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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의 심판에도 그분의 사랑이 숨어 있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698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의 심판에도 그분의 사랑이 숨어 있나요?

 

 

* 소돔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천사의 눈에 비친 베를린의 모습이 소돔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영화에서 천사 다니엘은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어 여인을 구하는데, 소돔에 온 천사들이 롯을 구해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시 소돔의 멸망 사건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숨어 있나요?(20대 홍 비비안나 님)

 

 

영화와 성경을 연결하여 풀어내는 생각이 참 흥미롭네요. 소돔 이야기야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죠. 소돔 하면 하느님께 죄를 많이 지어 불벼락을 맞아 패망한 도시의 대명사로 압니다. 참혹한 결과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죠. 그런데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와 성경을 읽으면서 알게 된 내용이 일치하나요?

 

소돔 이야기는 창세 18,16에 처음 나옵니다(물론 성읍 자체는 창세 10,19; 13,10.13; 14장에 언급됩니다). 그리고 소돔이 심판받아 파괴되는 이야기는 19,24-25에 등장합니다. 그 사이의 상당히 긴 분량은 하느님의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일러 줍니다. 성경은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에 주목하라고 일러 줍니다. 자매님이 읽으신 소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짚어 볼까요?

 

 

소돔과 하느님의 심판

 

낯선 사람 셋이 한창 더운 대낮에 마므레에 사는 아브라함의 천막을 방문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들을 맞아 빵과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대접합니다. 최상급 재료를 사용한데다 일상생활에서 먹기 힘든 송아지 고기까지 내놓은 걸 보면 가히 최고의 대접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신에게 바치는 제물 수준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얼마나 극진하게 모셨는지 입증합니다.

 

나그네들이 아무도 여행하지 않는 한낮에 움직이는 모습은 매우 다급하고 중요한 일을 맡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식사를 끝낸 나그네는 뜬금없이 사라를 들먹이며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환대받은 값으로 던지는 축복의 말로는 매우 엄청난 약속입니다. 사라가 헛웃음을 짓는데, 그제야 성경은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야훼)’이라고 밝힙니다.

 

일행은 마므레를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소돔의 위치는 분명치 않습니다. 많은 학자가 “역청 수렁이 많”(창세 14,10)다는 점을 들어, 사해 남쪽으로 추측합니다. 고고학 탐사 결과 초기 청동기 시대에 담수 하천을 따라 성읍이 다섯 개 있었다고 추정하지만, 그곳이 소돔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소돔은 전설에 새겨진 기억이니까요. 아무튼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꽤 먼 데까지 배웅한 셈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려는 일을 처음 알리십니다. 하느님의 독백이 길게 소개되고, 아브라함과 긴 중재 과정을 거치는 이 대목은 성경에 드물게 나오는 매우 독특한 부분입니다. 한 성읍의 멸망을 앞두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깊이 숙고하며 정의와 공정을 다루시는지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소돔의 죄를 고발하는 것은 ‘원성’입니다. 죄의 피해자들이 내는 울부짖음이죠. 아벨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듯(창세 4,10 참조), 주님은 불의와 억압에 짓눌린 이들의 원성과 신음 소리를 듣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탈출 2,24 참조). 원성이 너무나 크기에 주님께서는 현장을 조사하러 내려왔다고 밝히십니다(창세 18,21 참조). 그러니까 주님과 두 천사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소돔 주민에게는 비보가 될 수 있는 특별 조치를 하려고 한낮에 오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현장에 투입됩니다. 나그네인 그들을 맞은 이는 역시 나그네인 롯입니다. 천사들이 그곳에서 성적性的·물리적 폭력을 겪습니다. 사회의 약자인 나그네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죄악은 “주님께서 곧 이 성읍을 파멸시키실 것”(창세 19,14)이라는 롯의 말을 ‘우스갯소리’(이 단어는 사라의 ‘웃음’과 같습니다)로 간주하는 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자기네 삶을 되돌아보기는커녕 한낱 농담으로 치부합니다. 약자는 물론 주님의 자리조차 없는, 자기네 이익과 쾌락만 가득한 그 성읍은 결국 유황과 불로 파멸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사랑

 

인류는 아브라함 이전에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시대에 성읍 두 개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이 확정되기 전에 아브라함은 “온 세상의 심판자”(창세 18,25)인 주님께서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아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의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하고 약속하십니다. 그 열 명이 공동체의 죄악을 견디며 공동체를 정의와 공정 쪽으로 변화시키리라 믿고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소돔에는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롯은 의인일까요? 그가 나그네들을 맞이하고 돌보느라 애쓰는 모습은 남다릅니다. 하지만 나그네를 대접하는 정도나 구원되는 과정을 보면 그의 의로움이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창세 19,29)하셔서 롯을 구원하셨다고 밝힙니다. 롯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부족하나마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창세 18,19)는 아브라함의 길을 따르고,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복에 참여했기에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기에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창조 세계를 위한 그분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거듭 하느님의 심판을 밝히며 정의와 사랑을 겸비하신 하느님을 더 깊이 드러냅니다. 한 예로 우리는 탈출기에서 잘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며 당신을 새롭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하느님의 심판과 사랑. 두 주제를 품고 성경을 통독해 보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관점이 바뀌면서 신앙생활이 성숙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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