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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의 숨은 이야기: 요한,  어찌  그리 달라지셨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492 추천수0

[성경의 숨은 이야기] 요한,  어찌  그리 달라지셨나요?

 

 

저는 요한 복음과 노자의 사상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습니다. 솔직히 제 학위는 ‘실력’의 결실이 아니라 사랑의 ‘합작품’입니다. 명성 높은 참고 서적도 무용지물이 되는 까막눈 신세였던 저는 매일이 난감하고 막막했습니다. 자존심으로 버티기? 아는 척하며 넘기기? 밤샘으로 실력 쌓기?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력은 고만고만…. 마침내 ‘작전 변경’을 시도했습니다. 주님께 항복의 백기를 들고 넙죽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포진한 막강 실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시 끼니를 거르고 밤잠을 놓치는 희생을 감수하셨던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그네들처럼 이웃의 모자람에 최선을 쏟아 주는 도우미로 살아 갈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요한 복음을 통한 고찰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사도 요한에 대한 개인적 소회는 무덤덤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읽히는 요한의 삶이 다른 제자들에 비해 특출하지도 않은데 애지중지하신 주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못마땅해서 더부룩해진 마음으로 요한의 허물을 까칠하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요한의 돼먹지 않았던 성정이 어떻게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우선 요한은 형님 야고보와 함께 다녔으니 떠돌이 생활의 외로움도 덜했을 법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 자기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안면몰수하고 치맛바람을 일으켰던 극성맞은 어머니 살로메가 있었으니 더 기세가 등등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니 마마보이, 철부지 근성을 벗지 못하고 ‘만찬 자리에서도 주님의 품에 안겨 비비대는 버르장머리 없는 짓거리를 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눈에 미운털이 박히니 요한의 면면은 더 얄밉기만 했다는 얘깁니다. 더욱이 그가 주님께 말씀드리는 일들이 죄다 심술 맞아, 더 눈꼴이 시렸습니다. 주님을 환대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마치 엘리야라도 된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거들먹대는 모습이야말로 ‘모자람과 허풍의 인증샷’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덜떨어진 요한을 끝까지 챙기신 주님의 심정이 더욱 의문이었습니다. 모두 주님을 버린 그때, 유독 당신의 임종을 지키도록 그를 붙드신 이유가 무엇인지, 무슨 까닭에 성모님을 모시는 일까지 요한에게 맡기셨는지 전부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저는 야고보와 요한의 인품을 멋대로 깎아 내리면서도 하나도 죄송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들 때문에 정말 속이 상했을 주님 마음을 ‘홀로 알아주는 양’ 여겼습니다.

 

어느 날, 사도 요한의 편지글이 길고 험난한 그의 일생을 일깨우기까지 제 생각은 늘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성급한 청년, 나대고 설치고 인정받기를 즐기던 그가 오직 기뻐하고 사랑하는 일에 능숙해지기 위해 견디어 낸 긴 단련의 시간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날 처음, 저는 요한의 마음속에 알알이 맺힌 슬픔과 인내와 아픔의 흔적이 빚은 깊은 생채기를 보았습니다. 교회의 원로인 요한이 교우들을 생각하며 적어 내린 겸손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글에 무디고 일방적이던 제 마음이 깡그리 부서져 내렸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요한의 행적을 살피면 그가 매우 용의주도했고 또 무척 이성적이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주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함께 새벽길을 번개같이 달려갔을 때에도 그는 침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7)는 세심한 관찰력.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요한 20,12)며 그 놀라운 광경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그러합니다. 마침내 그물에 걸려든 고기가 큰지 작은지까지 일일이 알려 주고 모두 “백쉰세 마리”(요한 21,11)라며 고기의 수까지 기록한 걸 보면 세심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에 탄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치밀했던 그의 성격 덕에 유다의 배신이 야밤에 일어났으며 빌라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요한 19,16)고 명령한 시간이 “낮 열두 시쯤”(요한 19,14)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무엇이 그를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인지, 요한의 돼먹지 않았던 성정이 어떻게 ‘사랑’에 젖어 사랑만 말하는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는지 캐게 됩니다.

 

 

성경은 주님께 사랑받은 요한의 참 모습을 은밀하게 일깨웁니다

 

요한의 형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순교는 분명히 가장 영예로운 죽음입니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가족의 마음은 고통의 수렁일 것 또한 분명합니다. 괴롭고 슬픈 마음에는 어떤 위로로도 지울 수 없는 시퍼런 멍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형님을 잃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엄청난 카운터펀치를 맞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순교하기 직전,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일입니다. 그 소식은 온 교회에 기쁨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헤로데 임금이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사도 12,2-3)고 전합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일 바로 전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똑같은 제자인데 왜 야고보 형님은 죽도록 내버려두셨는지? 왜, 형님 야고보에게는 천사를 보내 주지 않으셨는지?

 

요한은 야고보 형만 죽음에 처하게 팽개치신 주님이 야속했을 것입니다. 어째서 형과 베드로를 차별하시는지 따지고, 무엇 때문에 형님 야고보에게는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는지 덤비듯 항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주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전의 요한이라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따발총처럼 항의의 말을 쏘아 댔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저 같으면 공평하지 않은 주님의 처사가 용인되지 않아, 홱 돌아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싶습니다. 하여 감히 그때가 요한에게는 매우 서럽고 혹독한 시련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깊고 혼돈스러우며 외롭고 괴로운 통고의 시간이었으리라 헤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반응을 한마디도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두컴컴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었을 요한의 모습이 감지되어 제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 눈에 사랑의 콩깍지가 씌었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담담히 수용하기 위해 두 주먹 불끈 쥐고 버티고 선 요한의 안쓰러운 자태가 어른거렸습니다. 눈앞의 고통에 굴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신앙인의 기개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성모님을 모시고 지낸 시간도 요한에게 매우 친절한 사랑의 교과서였으리라 짐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 잉태와 자라남을 고통 속에 간직하신 어머니의 일생을 보며, 하느님 때문에 겪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순명을 배우고, 고통을 넘어선 찬란한 사랑의 모습을 익혔으리라 싶었습니다. 복음서가 앞다퉈 전하는 베드로 사도의 배신 장면을 요한이 유일하게 목격했지만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는 점에서도 그의 변화된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께 사랑받은 요한의 참 모습을 은밀하게 일깨웁니다. 한참 모자라고 덜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성질머리 더럽고 성급했던 요한을 사랑의 일인자로 변화시키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순간마다 한 발짝씩 사랑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미성숙한 요한을 택하여 ‘새로이’ 빚으신 당신에게 오늘의 나를 온전히 맡기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허물, 비좁고 왜소한 성격까지 꼼꼼히 살펴 당신의 도구로 업그레이드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교우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은혜의 최고봉에 오른 사랑의 모범을 만납니다. 사랑의 완성자로 빚어내신 주님의 솜씨를 봅니다. 더 사랑받기만 원하는 우리, 누구보다 더 인정받기만 좋아하는 우리, 내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혼쭐을 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병든 속내까지 고쳐 새롭게 해 주시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때론 매섭고 혹독하다 싶은 주님의 손길이 꼭 우리 삶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채워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더 ‘큰 상’을 주시려는 그분의 계획이며 작업이니 찬미 드립니다. 더 철저히 간섭하고 참견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품에 한껏 기대어 버르장머리 없이 응석을 부리며 살고 싶은 오늘입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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