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이야기] ‘엄친아’, 다니엘이 부러우시지요? 봄 내내 정치판이 들썩였습니다. 임명설 · 해임설 · 낙마설 · 퇴임설 · 사퇴설…. 자고 나면 뒤집어지는 갖가지 소식을 접하며 빠르고 잽싼 현대의 미디어에서 과연 ‘뉴스’라는 매체의 유효 기간이 얼마일지 궁금했습니다. 권력이 권위를 잃고 고작 세간의 가십으로 전락한 현실이 딱했습니다. 부디 우리 정치인들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자각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일꾼’이며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점을 잊지 않기를 기도드렸습니다(로마 13,1-7 참조). 아울러 우리 교우들이 진심으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1티모 2,2)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사실 권력이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뚱맞은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저 생각으로 어림하고 마음으로 짐작하며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뜬구름 같은 소재일 터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부모들의 기도에는 자녀가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하기를 바라는 ‘청원 기도’가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귀감이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힘껏 후원하시니, 더욱 분발하기 바랍니다. 꼭 응답을 받아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참된 모범 정치인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임금의 벗, 총리 대신으로 임명된 다니엘 다니엘서는 기원전 605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소년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뽑혀 왕궁에서 교육받게 된 사실을 전하며 시작합니다. 다니엘의 총명함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감지할 수 있는데요. 그의 대단한 면모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 의해 총리로 발탁된 것에 이어 그 아들 벨사차르 임금 시대에도 총리 대신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다니 5,29 참조). 뿐만 아니라 바빌론을 멸망시킨 칼데아의 임금 다리우스에게 재상으로 뽑히고(다니 6,3 참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게는 “임금의 벗”(다니 14,2)으로 존경을 받았으니, 정말 대단하다 싶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모시던 왕조가 무너진 후에도 연이어 새 정복자의 신임을 얻어 나랏일을 계속 맡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입니다. 가히 다니엘의 특출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임금의 신임을 평생 얻는 일도 보통이 아닐진대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바뀌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줄기차게 고수할 수 있었으니 이런 천복(天福)이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성경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다니엘의 나이조차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다니 1,3) 중에서 뽑힌 인물이었다는 설명에 기대어 그가 유다의 귀족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내려진 임금의 ‘선처’는 포로에게 매우 큰 특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주 특별하고 월등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포로 신세로 적국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훈련된 처지는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에서 드러난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이 더욱 돋보입니다. 나라는 망해 사라지고 이국땅의 포로가 된 현실에서,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지내는 것이 쉬울 리가 만무한 까닭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믿음을 모두에게 밝히며 지낸 점이 말할 수 없이 귀합니다. 그들이 늘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은 용기에 찬탄하게 됩니다. 임금도 사자도 불도 결코 다니엘을 해칠 수 없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에게서 다니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벌렁댔던 기억이 여태 뚜렷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모함으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져야 했던 상황이 어찌나 분하고 속상했던지 오래오래 마음에 응어리졌습니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 빼어나고 똑똑하다는 사실만으로 시기와 질투를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저의 순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반듯하거나 ‘전혀 흠이 없다’는 것이 왕따의 조건일 수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으니까요. 마침내 다니엘처럼 너무 똑똑하고 확실하고 바람직하지 못해서, 친구가 많은 제 처지를 아주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만 원했던 믿음의 사람이라면 으레 세상의 비판쯤이야 너끈히 견디는 덕목을 갖추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덕에 성인이 되었으니 불만이 없을 것이다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니엘이 겪은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 영적 전쟁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서른 날 동안 임금님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져야 한다”(다니 6,8)는 칙령 앞에서 고심했을 다니엘의 심중이 짚어졌습니다. 성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며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이 마음을 깨웠습니다. 다니엘은 역겹고 치사하고 유치한 권력의 아귀다툼에 맞서 수모를 당하며 입술이 부르트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투를 겪었을 것입니다. 그날 저는 비로소 다니엘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할지 물어 보았습니다. 아마도 딱 30일 동안만 조용히 ‘하라는 대로’ 시늉할 궁리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매일 세 번씩 올리던 기도를 슬쩍 한 번으로 줄이는 꼼수를 계산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니 충분히 헤아려 이해해 주시리라는 전제로 ‘믿음’을 내세우고 ‘자비’를 흥정하며 30일 기도를 생략했을 것만 같았습니다. 다니엘에게도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타협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모든 사안을 버리고 예전과 똑같이 하느님을 향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기로 했던 그 순간, 다니엘의 영혼이 순교를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구나! 이것이 신앙생활이구나!’ 홀로 탄복하며 순수한 영혼의 찬란함에 마음이 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모든 일에 탁월했습니다. 분명 하느님의 보호와 강복의 결과입니다. 임금도 사자도 불도 다니엘을 해칠 수 없었던 뚜렷한 이유는 특별한 은총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을 세상의 무엇으로도 훼방할 수 없다는 뚜렷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 얼마나 월등한지 온 세상을 일깨우는 표지로 삼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니엘이 하느님께 전혀 부끄럽지 않고 정의롭게 살았어도 회개하며 금식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는 점에 유념합니다. 다니엘은 결코 자신의 호의호식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기 민족의 죄를 밝히고 하느님의 자비에만 의지하는 마음을 토로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다니 9장 참조). 소소한 자기 삶의 회개를 넘어 하느님 백성의 대표자가 되어 기도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어”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청한 것이 틀림없습니다(다니 9,17-19 참조). 이 당당한 믿음이 하느님을 감동시킨 것이라 헤아립니다. 어린 다니엘이 초지일관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의 신앙 교육 덕분이라 짐작합니다. 부모의 야무진 가르침이야말로 다니엘을 평생 지키며 이끌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루 세 번씩, 꼭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드렸던 질긴 믿음을 지키게 한 힘이라 믿어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다니엘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 선정을 펼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기쁨일 줄 믿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가르침이 여리고 무딘통에 우리 자녀들이 덩달아 들쭉날쭉한 믿음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의 리더가 되는 일은 고사하고, 세상 기분에 맞추느라 애를 쓰고 지내니 속이 끓습니다. 다니엘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흠이 없는 삶이야말로 세상에서도 도무지 책잡힐 것 없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명령대로 제대로 살아 낸다면 세상은 기필코 그의 삶을 통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다니 3,95)라며 하느님을 칭송할 것이라고 다니엘서는 일러 줍니다. 하느님의 것만 추구하는 우리를 보면서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다니 6,27)고 덩달아 증언할 것이라고 일깨웁니다. 이 멋진 꿈을 향한 부모들의 기도가 더욱 열렬해지고 신앙 교육이 훨씬 탄탄해질 때, 주님의 자녀들이 모두 세상이 부러워하고 샘을 내는 ‘엄친아’로 소문날 것입니다. 부디 그렇게 되시길….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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