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이야기] 잽싸게 ‘뒤집어집시다’ 세상의 창조 설화를 들려주며 시작되는 성경은 완전히 새로운 하늘과 땅,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묵시 21,10)의 도래를 이야기하며 마감됩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열두 성문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적혀 있고, 도성 성벽의 열두 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진 사실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명단에 에프라임과 단의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도 요한의 실수가 아니라면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의 착각이나 후대 기록인의 실수로 누락됐을 리가 만무하니, 주님의 뜻을 더듬게 됩니다. 에프라임과 므나쎄는 이집트 총리였던 요셉의 아들이었는데도 “너의 두 아들을 내 아들로 삼아야겠다”(창세 48,5)는 할아버지 야곱의 뜻에 따라 삼촌들과 동등한 지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결과적으로 야곱의 아들이 열셋으로 불어나 버렸는데요. 야곱의 기습적 결단에 하느님도 화들짝 놀라셨는지 얼른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를 당신의 몫으로 뽑아 가려내십니다(민수 3,9-12 참조). 그 덕에 이스라엘 후손은 계속 열두 지파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늘의 예루살렘 성문에는 이스라엘 열세 지파의 이름이 적혀야 마땅할 텐데, 열둘이라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더욱이 맏형 르우벤을 제치고 장자 가문을 계승한 에프라임의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더럭 요셉이 올라 있는 점도 묘하고, 단 지파의 이름은 오리무중입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요? 어째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요셉의 아들 둘이 들어갔을까? 이스라엘 역사에서 에프라임은 늘 이스라엘의 대표로 거명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뺀 열 지파의 임금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 예로보암이었습니다. 에프라임의 역사가 곧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로 기록된 이유일 터입니다. 때문일까요? 북이스라엘 예언자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호소는 늘 “에프라임아, 에프라임아”라는 애끓는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을 현혹한 일을 아파하십니다. “예로보암이 혼자만 지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까지도 죄짓게 한 그 죄 때문에”(1열왕 14,16)라며 내내 애통해하십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호세 11,8)라시며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호세 8,12)고 하시는 주님,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며 몸서리치시는 주님의 통곡을 성경은 선연히 기록합니다. 때문일까요? 남북 이스라엘 임금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이 “예로보함의 길을 걸었다”(1열왕 15,34)는 것과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는 것으로 판가름됩니다. 분명 에프라임의 죄는 우상 숭배에서 꼬여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그러면 단 지파에게는 어떤 지울 수 없는 죄가 있었던 것일까요? 야곱의 다섯째 아들 단의 계보를 살피면 매우 독특한 부분이 눈에 띕니다. 우선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처음으로 인구 조사를 했을 때, 단 지파 자손의 수는 ‘62,700명’이었습니다. 이는 1등인 유다 지파(74,600명)보다 적은 2등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40년 후에 행한 두 번째 인구 조사에서도 ‘64,300명’을 기록한 이사카르 지파를 단 100명 차로 누르고 2등 자리를 고수합니다. 당시 노동력의 제공자, 싸움에 나갈 아들이 많다는 것이야말로 가문의 힘이며 자랑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단 지파에 내린 하느님의 복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민수 26,43 참조). 또 하나 단 지파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을 지을 기술자로 유다 지파의 브찰엘과 단 지파의 오홀리압을 지명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곧 재능과 총명과 온갖 일솜씨로 채워 주겠다”(탈출 31,3)고 이르신 유다 지파 브찰엘의 영예도 탐나지만, 그를 도와 같이 일할 인물로 뽑힌 오홀리압에게 “마음에 재능을 더해 주어,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만들게 하였다”(탈출 31,6)고 꽝꽝꽝 선포해 주신 일도 무척 부럽습니다. 더 흥미를 끄는 일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려고 티로 임금 히람에게 “금은과 청동과 철을 다루고, 자홍과 다홍과 자주 색 천을 짜며, 조각도 할 줄 아는 기술자를 한 사람”(2역대 2,6) 청했을 때 “단 출신 여자의 아들로서, 아버지는 티로 사람”(2역대 2,13)인 후람 아비가 천거된 일입니다. 이쯤에서 단의 후손들에게는 특별한 예술 감각과 손재주가 있었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 지파가 미카의 집을 습격한 사건, 즉 “에폿과 수호신들과 주조 신상”(판관 18,18)을 약탈했던 것도 ‘아는 만큼 보았던’ 단 지파의 예술적 안목에서 저지른 과오가 아닐까 짐작되어 안타깝습니다. 아무튼 단 지파에게는 대대손손 후손이 불어나고 무슨 일에서나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만큼 단 지파의 고장이 늘 우상 이야기에 연루되는 일이 속 터집니다. 결국 여호수아에게서 분배받은 땅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여호 19,47)는 단 지파의 허망한 말로가 믿기 어렵습니다. 에프라임처럼 주님의 애간장을 녹이고, 단의 후손처럼 세상 것에 쏠린 우리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의 아들 ‘에프라임’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의 아들로 승격되는 복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에프라임 지파가 하느님의 선물인 권력과 능력을, 땅의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소진해 버린 사실이 마음을 찌릅니다. 단 지파가 이집트에서 고되게 노예 생활을 하는 중에도 후손이 크게 번성하는 복을 얻었으며 주님에게서 특별한 탈렌트를 받았는데도, 그 지혜와 솜씨를 우상을 제조하고 섬기는 일로 탕진했다는 사실을 건성건성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상과의 악연을 단호히 끊어 낼 노력은 간데없이, 돈이라는 금송아지를 섬기느라고 주님에게서 받은 탈렌트를 오용하는 우리 모습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듭된 호소와 넓은 사랑을 묵살하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후벼 댈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호세아는 에프라임이 멸망한 원인을 “에프라임은 뒤집지 않고 구운 부꾸미”(호세 7,8)였다고 표현합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고소하게 구워야 맛이 나는 부꾸미를 뒤집지 않고 굽는다면 한쪽만 새카맣게 탈 것이 뻔합니다. 주님의 뜻에 느릿느릿 대처하는 삶은 어느새 한 면이 시커멓게 타버려 음식 쓰레기가 된다고 참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도 하느님과 금송아지를 함께 섬기며 노릇노릇하고 맛깔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경고로 듣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부요와 명예를 지녔더라도, 누구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졌더라도 우리 삶의 한 면은 시커멓게 타버릴 것이라는 경고라 믿습니다. 에프라임처럼 주님의 애간장을 녹이는 우리를, 단의 후손처럼 세상 것에 쏠려 있는 우리를 향한 경고라 헤아립니다. 세상에서 으뜸이던 에프라임의 이름이 천상의 명단에서 제외된 사실은 몹시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회개의 선물이 봉헌되기를 고대하십니다. 회개는 스스로 한 결심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결심의 어원은 ‘잘라버리는 일’이라는 라틴어에 있습니다. 결심이란 필요 없는 것과 본질이 아닌 것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잘라내지 않고 ‘달아 놓고’ 이것저것으로 ‘눈가림만 해 놓고’ 또는 ‘잘라져라’는 생각만 한다면 허사입니다. ‘나중에 잘라지겠지’라는 막연한 마음은 결심이 아닙니다. 변하고 새로워지지 않는 신앙은 영적 게으름과 태만의 증거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순간의 것에 불과합니다.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2베드 3,10)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새 예루살렘 성벽에 우리 이름이 누락되지 않기 위해 세상을 향했던 걸음을 뒤집어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탈렌트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마음을 뒤집어야 합니다. 사라질 땅에서 기껏 백 년을 호의호식한들 주님께 잊힌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에프라임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리석고 지각이 없다”(호세 7,11)는 삼엄한 경고를 듣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 나의 하느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시리라”(호세 9,17)는 심판의 말씀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얼른얼른 민첩하게 뒤집어지기를 원합니다. 부디 생명의 책에서 우리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기를 소원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9월호(통권 450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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