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숨은 이야기] 세상의 모든 아기는 모세입니다 위령 성월,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 43,21)는 주님의 고백이 온 땅을 적십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는 예언자의 음성에 온 천지가 젖어듭니다. 곁을 떠난 이들과 작별한 아쉬움을 더듬으며, 이 땅에 쉼 없이 새 생명을 선물하고 계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당신 구원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시편 121,4)시는 주님의 손길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반기를 든 탓에 꼬박 마흔 해 동안 광야를 헤맨 일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처음 명령받았을 때 백성의 숫자가 마흔 해가 흐른 뒤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소스라치듯 일어나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603,550명(민수 1,46 참조) 빼기 601,730명(민수 26,51 참조). 꼬박 마흔 해 동안 허송세월하듯 광야를 떠돌았는데 고작 1,800여 명밖에 줄어들지 않았다니, 신비의 커튼을 들춘 기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딱 일 년간 광야 교육을 한 다음 가나안에 입성시키려 하셨으며, 백성의 숫자는 60여만 명 정도라는 계획안을 수정 없이 시행하신 사실을 일러 주는 듯했으니까요. 그야말로 하느님의 감추어진 지혜라 믿었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가 말씀대로 성취되리라는 증거라 확신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기, 모세 인구가 계속 불어나면 삶의 질이 저하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염려했습니다. 온 세계가 인구 증가를 우려하며 다양한 대책을 강구한 결과, 이제는 ‘저출산’이라는 기이한 현상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태아의 낙태는 묵인됩니다. 유전자 검사로 기형아 판별을 받으면 주저 없이 낙태를 권합니다. 이런 행위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러울까요? 분명히 주님께서 새 생명을 땅에 보내신 뜻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는 복을 계획해 놓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답시고 주님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행위야말로 끝내 허무에 이를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 놓인 생명일지라도 애끓는 모성으로 대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태어나는 모든 생명에게 우리가 행할 바는 단지 ‘더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고민하며 ‘사랑의 인큐베이터’를 장만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기, 모세를 생각하신다면 제 주장이 쉬이 이해되실 듯합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케벳(탈출 6,20; 민수 26,59 참조)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모두 강물에 던져야 한다는 파라오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인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탈출 1,9)는 우려 때문에 그 명령이 내려진 것을 생각할 때, 자손을 번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마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감천만으로 여겨졌을 것 같습니다. 부모들은 아기를 강에 던지며 얼마나 오열했을까요? 아기를 숨겨 놓고 키운 요케벳은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을까요? 그 괴로움과 아픔과 탄식이 눈에 선합니다. 어쩌면 모두 험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도 같습니다. 차라리 유산되어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코헬 4,3)을 보지 않게 되기를 소원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요케벳은 아들을 숨기기 위해서 이웃에게도 “딸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과 웃음소리에 천 번 만 번 가슴이 철렁댔을 것도 같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입단속을 시키려고 아론과 미르얌을 아기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더는 숨겨 키울 수 없어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탈출 1,22)라는 파라오의 명령에 따르려 한 그날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애간장 끓는 고통을 추스르며 고민하고 머리를 짜내느라 며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을 것입니다. 요케벳의 모성애에 응답하신 생명의 하느님 마침내 요케벳은 왕골 상자에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에 띄우면서 얼마 동안이라도 아기의 생명을 연장해 주려 합니다. 상자의 엉성한 틈에 역청을 바르고 또 바르며 안팎을 송진으로 메우는 요케벳의 손길이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법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임금을 속이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일을 이웃이 눈치챘다면 빈정댔을 것입니다. “정들기 전에 내다 버릴 일이지” 하고 고개를 돌리고 “뭔 못할 짓이냐?”고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뭣하러 석 달 동안 정을 들여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당하느냐?”고 “차마 못 볼꼴이라”고 함께 울어 주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기는 살아날 수 없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운명을 지닌 아기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아기를 살리셨습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간 일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울고 있는 히브리 아기를 불쌍히 여기도록 하느님께서 그 마음을 흔들어 주셨다고 믿습니다. 파라오의 딸이 상자를 여는 긴박한 순간, 하느님께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겁에 질리게 하는 “지극히 노여운 눈”(에스 5,1⑦)을 “부드럽게 바꾸어”(에스 5,1⑧) 놓으셨다고 믿습니다.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탈출 2,6) 하면서도 외면하지 않은 마음, 불쌍히 여기고 스스로 거둘 생각을 갖게 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케벳이 임금을 속이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하느라 꼼수를 부리고 꾀를 썼다고 꾸중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련할 만큼 대책 없는 모정에 즉각 응답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의 행위에는 힘이 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그날, 요케벳이 안쓰러운 마음을 털고 아들을 살려 낼 궁리에 골몰한 모습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케벳은 백일 된 아기를 죽음의 길에 내놓으며,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골 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워 놓은 아기가 살아남으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단 며칠, 단 몇 시간, 단 몇 분이라도 더 살게 하려 한 모성애를 주님께서 진하고 진한 기도로 받으셨습니다. 요케벳이 정성을 다하여 역청과 송진을 바른 그 상자가 바로 아기를 되살려낸 ‘생명의 인큐베이터’였습니다. 파라오가 저지른 일은 파란만장한 인류 역사에서 유래 없는 일입니다. 말 그대로 ‘인종 말살 정책’입니다. 파라오의 명령대로 강물에 던져진 아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참혹한 정경을 상상하는 일부터 고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그 끔찍한 현장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고 밝힙니다(탈출 2,23 참조).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파라오의 명령이 떨어져 있습니다. 태아에게서 기형 유전자가 발견되면 낙태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탄의 법령이 ‘현대인의 지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살리려고 합니다. 생명의 기본 권리를 깨달아 생명에 관한 모든 권한이 하느님께 있음을 외칩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행위는 범죄입니다. 낙태는 명백한 살인 행위입니다. 죽어가는 태아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인간의 행복을 논하는 일이야말로 언어도단입니다. 지금도 매일 6천 명의 태아가 ‘죽음의 강’에 던져지고 있습니다. 매년 2백여만 명의 태아가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의 죄악에 진저리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결단을 기대하십니다. 한 사람의 모세를 살리려고 왕골 상자에 역청을 바르는 손길을 찾으십니다. 생명을 위해 송진을 덧바르는 끈끈한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위령 성월, 오늘도 소리 없이 죽어 간 태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도합니다. 부디 이 못된 세상을 용서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 장재봉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들과 10여 년 뒹굴다가 ‘새 갈릴래아’인 김해 활천 성당 주임으로 옮겼다. 평화방송 TV ‘장재봉 신부의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에 출연 중이다.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외 여러 책을 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1월호(통권 452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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