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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글] 참고자료/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2 조회수540 추천수3 신고
 
[펌글] 참고자료임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마태오 23,23-26

작은프란치스코 cafe.daum.net/smallfranchiscocafe.daum.net/smallfranchisco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내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모세의 이름을 팔며 모세의 선포한 율법을 자기들의 유리한대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꾸짖는 상황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도자들의 모습은 과거 구약에서 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흔들리고, 기업들이 죽어가며, 나라가 무질서해지는 이유도 무식한 서민들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이 법과 제도를 자기들의 유리한대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21세기의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도 뉴스에서 보고 있습니다. 아마 내일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기 위해서는 루카보다 오히려 마태오 복음이 더 확실하게 나와있기에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즈음의 예수님의 활동은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지도하고 인도하는 목자가 되어야 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가증스러운 행위를 그냥 두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근본 문제를 하나하나 파헤쳐서 우리에게 그들의 일곱 가지 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불행(화)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에제키엘 8장에 보면 "이스라엘 집안의 원로 일흔 명이 사판의 아들 야아잔야를 가운데에 세우고 저마다 향로를 들고 그 앞에 서 있는데, 향기로운 향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의 원로들이 어둠 속에서, 저마다 우상들을 새겨 놓은 방에서 저지르는 짓들을 보았느냐? 그러면서 저들은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이 땅을 버리셨다.’ 하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너는 그들이 저지르는 더 역겨운 짓들을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11-13)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로란 지금의 신부나 목사와 같은 위치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가까이 나아가 진실로 하느님을 예배하고 섬기지 않고, 자신들의 야욕과 잘못된 지식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자기들의 편리한데로 요리함으로 하느님과 백성들 가운데 서서 컴컴한 방이나 막힌 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교회를 섬기고 지도하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들이 사람들 위에 서서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뿐 아니라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이 심판의 경고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백성을 지도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시간 우리는 하느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지식과 교만의 담을 헐어버리고 솔직하게 내 마음과 영혼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참된 삶인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장에는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럴듯한 교만으로 자기를 포장하는 이중적인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혼돈과 무질서를 깨닫고 슬퍼하고 애통하고 탄식하며 가슴을 치며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 보면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면서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아버지와 내가 하나된 것 같이 저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신자들은 하느님과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하늘의 영광의 옥좌를 버리고 당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러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신자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자기들이 보기 좋은 것만 골라 둘러대고 깊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제한하거나 접근조차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

다시 마태 23,15에 두 번째 불행(화)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데리고 오는 것으로 그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복음대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그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하느님의 마음에 합당한 진실한 자로 살다가 그 진실 속에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본다고 하고 남이 안 본다고 하지 않는 이 자체가 영혼이 죽어 가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인이 찾으시는 사람은 주인의 마음에 합당한 자입니다. 초동 다윗을 찾으신 하느님의 눈으로 오늘도 여러분을 살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진 지식을 교만의 도구로 멸망의 도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건강과 재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초점에서 멀어져 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섬길 수 있는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마태 23,16-19절에 보면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사실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한 맹세이고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분을 두고 한 맹세이며 또 하늘을 두고 한 맹세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두고 한 맹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재물 때문에 깨달음과 판단력이 흐려져 헛된 것을 따라가서는 안 돤다는 가르침입니다.

마태 23,23-24절을 보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완전한 십일조를 위해서 음식의 양념향신료로 쓰이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드렸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과연 십일조 봉헌의 중요성이 바치는 물건 분량의 정확성에 있었던가? 그래서 그것이 자랑이 되고 올바른 신자의 기준이던가? 그들의 이런 기준에 대해 예수님은 아니라고...위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일조의 올바른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치의 정확성이 아니라 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는 신앙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에게 다시 돌리는 상징으로서 십일조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은 십일조보다 더 근본적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즉, 십일조를 드릴 때 믿음으로 해야 하며 십일조라는 행동은 믿음에서 나와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의 돌보신다는 믿음,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그의 영이 하느님의 의를 제공하고 사랑과 자비를 공급하고 있음을 믿는 신앙 바탕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이지 재물 더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 23,25-26을 보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 이 내용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말씀을 깨닫는 자마다 이제는 말씀 안에서 진정한 눈을 뜨게 됨으로써 그동안의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회개하면서 가슴을 치며 애통할 줄 아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하느님이 뽑은 사람

 

하느님이 뽑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한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지 않고,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위엄 있게 처신한다.

그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고,사람들을 위하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한다.

사람이 뽑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그릇된 생각과 불순한 동기와 속임수로 복음을 전한다.그래서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해 준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고,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고 탐욕을 부린다.

그는 애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소명도 없이 자기를 죽이며 산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물질의 십일조는 내면서 마음의 십일조는 무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위선자가 되었다.

그들은 겉은 깨끗이 하지만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나는 어떤가?

나도 점점 위선자가 되는 것 같다. 나도 점점 하느님이 뽑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뽑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힘든 게 싫으니까.

오늘의 묵상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심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무엇이 그분의 질책을 듣게 하는지요? 위선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듯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안과 밖이 다르면 언제라도 꾸중을 듣기 마련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조신(操身)했습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부정’을 저지를까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습니다. 민중과 분리되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면 부정을 저지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더러는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이웃을 멸시하였습니다.
율법의 근본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본질이건만 엉뚱한 것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켜도 사랑이 없으면 강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주님께서 원하실 리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해악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에서 명하는 부정’에서 벗어나려고만 애를 썼습니다. 진정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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