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코헬렛]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 친구들과 뛰어 놀던 한 아이가 제게 작은 물건 하나를 맡겼습니다. 놀다 보니 손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믿는 이들의 인생이란 이 아이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자유롭고 기쁘게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적당한 때에 그분께서 맡긴 것을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우리에게 기쁘게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11,8 참조). 이러한 권고는 코헬렛 전반에 걸쳐 골고루 나타납니다. 코헬렛은 성문서의 다섯 두루마리(머귈로트) 중 하나로 초막절에 읽는 책이었습니다. ‘코헬렛’이라는 제목은 수수께끼 같은 이 책의 특징처럼 색다릅니다. 코헬렛은 ‘소집하다, 모으다’는 뜻을 지닌 ‘카할’에서 나온 말로, 이 책에 일곱 번 나오며 ‘말씀의 수집자’, ‘집회의 소집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대략 기원전 3세기에 쓰인 코헬렛은 모두 12장으로 서론과 결론에 나오는 두 편의 시(1,2-11; 11,7-12,8 참조)가 두 개의 기본 단위인 1,12-6,9과 6,10-11,6을 둘러싸고 있습니다(A. G. 라이트). 두 개의 중심 부분에는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 ‘알 수 없다’, ‘깨닫지 못한다’ 등 서로 다른 후렴구가 나옵니다. 사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좋아하는 저자는 “일의 끝이 그 시작보다 낫고 인내가 자만보다 낫다”(7,8)처럼 ‘A보다 B가 더 낫다’는 형식으로 ‘토브(좋은)’를 사용하여 자신의 지혜를 드러냅니다(W. 짐머리). 이 밖에도 저자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수사학적 질문이 매우 많습니다. 저자의 표현은 학교나 가정에서 배우고 알게 되는 지혜나 지식에 저항하는 듯 보입니다. 지혜의 정신이 지성의 결과로 잘 드러난 욥기나 잠언과 달리 코헬렛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이집트의 교훈집에 뿌리를 둔 ‘왕의 유언(royal testament)’이라는 문학 형식을 사용하는데, 솔로몬 임금의 현실 이해를 표현하는 문학 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J. L. 크렌쇼). 저자는 ‘현인’(12,9)이었고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임금’(1.12)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지혜로 살펴 깨치려고 내 마음을 쏟았다”(1,13)고 하는데, ‘살펴 깨치려고’는 히브리어로 ‘다라쉬’와 ‘투르’ 두 단어입니다. ‘다라쉬’는 일반적 탐구를 말하며, ‘투르’는 정탐과 같은 특별한 조사를 뜻합니다. 저자는 지상에서 의미 있는 행동을 철저히 탐색한 결과로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1,14)이라 확신합니다. ‘바람을 잡는 일’이란 현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무런 가치나 이익도 없다는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1,2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 말씀은 전통 가르침과 매우 다르며 창세기의 ‘보시니 좋았다’는 창조 신학의 기초를 흔듭니다. 본래 토라의 가르침은 세상과 인간의 삶을 긍정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코헬렛은 시작(1,2 참조)과 끝(12,8 참조)에 허무의 최상급을 사용하여 세상을 부정한 후, 비로소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12,13 참조)고 합니다. “너무 의롭게 되지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이 행동하지 마라”(7,16)라든가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 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7,20)라는 구절은 정통 신학의 가르침과 너무 달라 참으로 당황스럽습니다. 경험적 성찰을 토대로 한 코헬렛의 이 말씀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나(R. N. 와이브레이) 과장된 의와 지혜를 피하라는 가르침으로 여기기도 합니다(T. 크뤼거). 코헬렛의 저자는 전통 내용을 담은 본문 속에 자신의 신학적 신념이 담긴 본문을 적절히 삽입하여 정경 문서가 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J. 블렌킨솝). 2,17 그래서 나는 삶을 싫어하게 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 좋지 않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이전의 현자들이 인간의 삶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 것과 매우 다릅니다. 죽음은 현자들이 추구하는 모든 의미와 수고해서 얻은 것을 부질없게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운명’(9,2)으로 번역된 코헬렛의 핵심 용어 중 하나인 ‘미크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불시의 사건을 의미하며 ‘죽음’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R. E. 머피). 저자는 현실에서 만나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같은 ‘미크레’를 가지고 있기에 모두 같은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고 합니다(2,14; 3,19; 9,2 참조). “모두 같은 운명이다. 의인도 악인도 착한 이도 깨끗한 이도 더러운 이도”(9,2). 코헬렛의 저자는 사후 세계에 대해 모르며, 그곳에서 받을 보상이나 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입증하기 어렵고 인간의 지식으로 깨달을 수 없는 불확실한 점에 대해 갈등을 겪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11,9-10; 12,1-7 참조). 코헬렛에는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허무, 태양 아래서, 하늘 아래서, 유익이 없다, 같은 운명, 몫, 하느님의 선물, 수고, 모든). ‘반복’이라는 모티브는 저자의 신학을 드러내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말들 중에 ‘헤벨(헛되다)’은 책 전체에 서른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실체 없음’, ‘인간의 삶에 대한 덧없음’, ‘인간의 우매함’이라는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D. B. 밀러). ‘태양 아래서’라는 말은 스물아홉 번이나 반복되며 시공간의 제한을 갖는 상징적 이미지를 지닙니다. 태양의 공간적 이미지는 하늘에서 뜨는 위치에서 기인합니다. 해는 뜨고 지는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때(에트)라는 시간 개념으로도 설명됩니다(3,1-9 참조). 따라서 ‘태양 아래서’, ‘하늘 아래서’라는 말은 ‘땅 위에서’라는 말과 대비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세상에서 고생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R. E. 머피). 3,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인간 세상에서 부정적 경험을 하고 삶을 철저히 탐구한 저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확신합니다(J. L. 크렌쇼). 첫째, 죽음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합니다. 인간의 숨이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희망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하고 말합니다(4,1-3; 6,1-6; 7,2 참조). 둘째, 지혜는 그 목표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지혜를 지녀도 인생은 안전하지 못합니다(3,11; 7,13-14; 8,17; 9,13-16 참조). 셋째,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행운은 누구에게도 생기지 않고 인간은 제때에 일어나는 사건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며,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때 하느님의 끊임없는 활동은 허무합니다(1,13; 3,18; 11,5 참조). 넷째, 세상은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도 오래 살고 완전한 선도 없기 때문입니다(7,16-17.20 참조). 다섯째, 쾌락은 인간을 끌어들이는데 이는 보상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상을 베풀어 주지 않고 선한 행동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5,18-19; 9,7; 11,9-10 참조). 코헬렛을 살펴본 결과 저자는 진리 안에서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세상에 사는 인간은 매우 불안하고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철저히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살 뿐이라고 합니다. 코헬렛은 우리가 주님께 선물로 받은 ‘기쁨(시므하)과 필요해서 소유한 ‘몫(헬레크)을 잘 구분하라고 권고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겸허하게 살아갈 지혜를 지니라고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시편 127,1).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인생(草露人生)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처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안에 있으니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몫을 받고, 그분께서 허락하신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시편 73,25-26; 로마 8,32 참조). 다음 호에서는 ‘노래 중의 노래’ 아가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김경랑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이다.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삶의 현장인 수지 가톨릭성서모임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열매 맺으며 살아간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0월호(통권 451호), 김경랑 귀임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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