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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이사야서 - 이사야서, 한 지붕 밑의 세 가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051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이사야서] 이사야서, 한 지붕 밑의 세 가족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를 불문하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언서는 무엇입니까? 아마도 예언서의 시작이며 전례 때 어느 예언서보다 자주 선포되는 이사야서가 아닐까요? 구약성경에서 가장 긴 책 이사야서는 통상 제1이사야(1-39장), 제2이사야(40-55장), 제3이사야(56-66장)로 구분되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역사적 정황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습니다. 세 부분이 다른 역사와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한 지붕 밑의 세 가족처럼 1-66장 전체가 하나의 예언서를 구성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체의 통일성을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1이사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예언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제1이사야의 역사적 배경

 

다윗과 솔로몬의 치세로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러 결국 두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약 170-180년이 지난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등장하여 예루살렘 도성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제1이사야’라고 부르는 1-39장의 이사야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 호세아, 미카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는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예언자의 소명을 받고(6,1 참조),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 임금의 치세 기간에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남유다는 내부적으로 우찌야 임금 치세 때 경제가 상당히 번영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종교 생활, 사치와 향락 등으로 사회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반면 대외적으로는 아시리아가 페니키아, 시리아, 이스라엘 등 남서쪽 지역으로 세력을 떨치며 정복 전쟁을 벌여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시점입니다. 이렇듯 이사야 예언자가 등장할 당시, 유다에는 사회적 · 종교적 타락과 더불어 아시리아의 위협과 국내 정치의 불안이 날로 더 커져 갔습니다.

 

따라서 1-39장은 복잡한 정치 상황 아래에서 근동의 패권국 아시리아로 인한 남유다의 총체적 위기를 다룹니다. 제1이사야 예언자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남왕국에서 40여 년간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아시리아의 개입 또는 침략이 몇 차례 이루어집니다. 그 개입의 첫 계기가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입니다.

 

아시리아가 정복 국가를 무자비하게 다루었기에, 정복된 군주들은 기회만 되면 저항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일례로 시리아(다마스쿠스)의 르친과 에프라임(이스라엘)의 페카가 동맹을 맺어 연합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들은 아시리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인 이집트와 연계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있는 유다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유다 임금 아하즈가 이를 거부하자 르친과 페카 임금은 동맹을 맺어 유다를 침략합니다. 이사야는 아하즈 임금에게 아시리아 군대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의 도움을 믿으라고 권고하였으나, 이를 믿지 못한 아하즈는 이사야의 조언을 거부한 채 하느님 대신 아시리아에게 해방의 손길을 기대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임금의 이러한 결정을 만류한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자로 부른 아시리아가 오히려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을 내놓습니다(7,18-25; 8,1-10 참조). 결국 아시리아의 개입으로 마무리된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은 시리아와 북이스라엘 왕국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유다 임금 아하즈는 아시리아 제국의 봉신(封臣)이 되고 맙니다. 결국 유다는 이사야가 염려한 대로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고,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공물을 바쳐야 하는 봉신 국가로 전락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처럼 해방자를 자처하며 약소국을 점령하여 봉신 국가로 만든 예를 필리핀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은 400년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에 의해 50년, 일본에 의해 10년간 식민 지배를 받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해방자임을 자처했습니다. 스페인은 무지몽매함에서 필리핀을 구한다며 들어왔고, 미국은 스페인의 억압에서 필리핀을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점령했습니다. 일본 역시 미국에게서 필리핀을 구하는 해방자라며 식민지로 삼았고, 다시 미국이 일본에게서 필리핀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을 들이대며 재점령하였습니다. 아시리아도 유다에게 해방자로 나타났으나 유다는 진정한 해방을 얻지 못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충고한 대로 하느님을 믿기보다 인간의 힘에 의지하고 그 손을 잡아 오히려 속박을 받게 된 것입니다.

 

 

6,8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이사야는 히브리어로 ‘여사야후’인데,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다’ 또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이사야’라는 호칭에 하느님의 업적 또는 예언자의 소명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느님께 예언자로 부름받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이사야서에 담긴 방대한 내용에 비해 이사야 예언자를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그는 여예언자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두었다고 소개됩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유다에 대한 심판과 희망에 대한 예언을 함의하는데, 두 이름에서 암시하듯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심판과 희망을 동시에 전하는 예언을 만나게 됩니다.

 

1-5장은 이스라엘의 죄악상에 대한 경고를 기술합니다. 특별히 5,1-7에 기록된 ‘포도밭 노래’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하느님의 심판을 언급합니다. 이어 6장에서 예언자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소명을 밝힙니다. 이 소명 사화는 이사야에 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그 광대한 이야기에 쓰인 동사 ‘보다(응시하다), 듣다, 말하다’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어좌에 앉으신 것을 보고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 고백하자(6,5 참조), 사랍들이 그의 입술에 타는 숯을 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6,7)고 말하여 그는 죄를 용서받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망설임 없이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 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주님, 언제까지입니까?”(6,11)라고 묻습니다.

 

이사야의 소명 사화에서 두드러지는 역동성을 ‘조각’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조각가는 염두에 둔 어떤 형상을 사용되는 재료에 따라 더하거나 빼는 방법으로 완성해 갑니다. 예를 들어 밀랍이나 흙 같은 재료는 덧붙이는 방법으로 형상을 만들고, 대리석과 같은 돌로 된 재료는 만들고자 하는 형상에 따라 그것을 떼어 냅니다. 조각은 그림과 같이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각도에서 제작되어야 합니다. 그 마력(?)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아버지의 성화를 뿌리치고 조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미켈란젤로와 같이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에는 모조품이 많습니다. 진품은 손상되지 않도록 박물관 같은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그 대신 거리나 광장에 모조품을 세워 쉽게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나 모조품은 진품을 절대 따라올 수 없습니다. 진품의 장중함과 정교함에는 예술가의 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자는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정교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에페 2,10 참조). 예언자도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뵙고, 말씀을 듣고, 주님께 “저를 보내십시오”(6,8)라고 말함으로써 사방에서 자기를 조각하듯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 계획에 역동적으로 참여합니다. 참예언자가 되어 가는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를 접하면서, 조각품이 예술가의 손에서 완성되듯 우리의 모습이 조각가이신 하느님 손에서 뭉툭한 채로 떨리거나 깎이지 않도록 좀 더 장중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지기를 희망합니다.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7장에는 임마누엘의 표징이 등장하고, 9-11장에는 장차 태어날 통치자의 구체적 위용과 활약이 설명됩니다. 임마누엘에 대한 약속은 아시리아의 무력에 직면한 급박한 상황에서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두려움을 느끼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그들이 처절하게 신앙고백을 할 것을 촉구합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주님의 영’으로 가득한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의 왕국을 이루는 일꾼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자, 가난한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고 악인을 위압하며 정의로 재판하는 자입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 수행하던 역할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임금의 출현과 평화를 일구는 광경은 우리가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는 굳건한 희망을 남겨 놓습니다. 두려움과 불신에 차서 아시리아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잘못을 범한 아하즈 임금과 달리 이민족들의 심판 예언 이후에 등장한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 임금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예루살렘의 구원과 회복을 체험합니다(38장 참조). 이사야 예언자는 현재 직면한 정치적 긴장과 불안한 미래에서 구원을 찾는 길은 아시리아 제국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달렸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 황미숙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으로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에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7월호(통권 460호), 황미숙 마리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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