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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이사야서 -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제2이사야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402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이사야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제2이사야서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영화와 연극, 심지어 짧은 드라마나 에피소드를 보고 들을 때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그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사야 예언서 전체에서 ‘제2이사야서’라고 명명하는 40-55장은 ‘유배’라는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해피엔딩을 예고합니다. 마치 해방에 대한 희망으로 접어드는 관문 같습니다. 이렇듯 제2이사야서에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로

 

난공불락일 것 같은 아시리아 제국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더니, 기원전 609년 마침내 바빌로니아에게 패하여 근동의 패권이 급속히 바빌로니아로 옮겨갑니다. 얼마 후 바빌로니아의 임금으로 등극하는 네부카드네자르 장군이 기원전 605년에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마저 제압하여 지중해 연안 지역도 바빌로니아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 휘하에 들어갑니다.

 

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많은 유다인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갑니다(기원전 586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을 떠나 바빌로니아로 유배되는 고통과 수모를 겪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담한 고난을 준 바빌로니아도 아시리아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바빌로니아는 강력한 임금이었던 네브카드네자르가 죽은 뒤(기원전 552년)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임금에 의해 멸망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예루살렘 점령부터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귀환 허락(‘키루스 칙령’)이 내려진 때까지를 ‘바빌로니아 유배 시기’라고 지칭합니다. 40-55장은 바로 그때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제1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한 기원전 8세기에서 약 200년이 지난 기원전 6세기경에 자서전적 정보가 거의 없는 이름 모를 예언자, 제2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합니다. 따라서 40장부터는 제1이사야서에서 펼쳐진 장면과 사뭇 다르게 무대가 바뀌고 등장인물도 다양해집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시련의 시간

 

유배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전해진 제2이사야서는, 낯선 이방인의 땅으로 끌려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는 희망의 말씀으로, 새벽 동이 터 오르는 듯 찬란하게 선포됩니다. 다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소식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유배’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들에게 선포된 이 희망의 메시지가 얼마만큼 큰 기쁨을 안겨 준 생명의 말씀이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언자가 선포한 이 희망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는지를 제가 마음으로 이해한 때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유배라는 상황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면서 비로소 그 깊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예언서를 배울 때 책과 강의를 통해 ‘유배’의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른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시험을 준비하면서 유배에 대한 외형적 지식을 머릿속에 차근차근 정리해 두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유배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 주님께서 제게 열어 놓으신 길은 외국 유학이었습니다. 6개월간 서둘러 언어를 배우고 입학했을 때, 로마의 아름다운 풍경도 제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홀로 던져진 것 같다는 느낌밖에 없었습니다. 수업 첫 날,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 140명과 함께 듣는 강의실에서 ‘교수님 가까이에서 들으면 더 잘 들리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여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간혹 아는 단어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모든 안테나를 다 동원해도 무엇을 설명하는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다른 학생들보다 피로감을 더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를 오가며 활짝 웃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면서 그들은 저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같이 느껴졌습니다. 석 달이 지나 12월이 다가오자 여러 수업과 세미나 발표, 매주 내야 하는 숙제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부대껴 등굣길이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유배’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묘하게도 강의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믿음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상황이 매일 전개되던 낯선 땅에서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 생활과 같다고 느끼게 한 것입니다. 강의 내용이 제 마음에 점점 크게 울려 와 눈물까지 맺혔습니다. 그때부터 이사야 예언자가 유배된 백성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가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씀’이었는지 비로소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

 

제2이사야서가 시작되는 40,1부터 하느님의 위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쏟아집니다. 그들의 죄와 잘못으로 고국을 떠나 유배 생활을 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확신에 찬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그들을 향해 외치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이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실현될 것입니다(40,5 참조).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된다는 것은 권능과 사랑으로 오시는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현존’을 고백하게 합니다(40,9-10 참조).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41,14)라고 표현하듯 이스라엘 백성은 보잘것없는 민족이었으나 하느님께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고 벌레 같은 처지에서, 그들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훌훌 털고 일어선다면, 강대한 민족이 될 것이므로 그분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자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거듭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이집트 탈출에 대해 희망을 품게 합니다(43,16-21 참조). 그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배라는 비참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종의 노래

 

제2이사야서에서 두드러지는 대목은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보통 ‘종’이라는 말은 희망 없는 타율적 구속拘束의 대명사처럼 들립니다. 그리스어에서 ‘노예’ 또는 ‘종’은 모욕과 멸시, 천대를 함의하는데, 이는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예언자는 이 용어를 사용하였을까요?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경에서 ‘종’이라는 말은 하느님과의 수직 관계에서 하느님에게서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를 일컫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여호수아, 사무엘과 다윗 같은 인물에게 붙여졌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주님의 종’은 하느님의 온전한 신뢰를 받고 권위를 위탁받은 자를 일컫는 호칭으로 정착됩니다. 이사야 예언자 역시 ‘종’의 그리스어 의미가 갖는 천대와 모욕이 아니라, ‘하느님의 온전한 신임과 권위를 지닌 자’를 표현하여 ‘주님의 종’의 위상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종’과 관련하여 제2이사야서에서 다루는 중요한 메시지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네 번이나 등장하는 ‘주님의 종의 노래’를 통해 이사야 예언자가 ‘고난’이라는 모티브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42,1-9; 49,1-7; 50,4-11; 52,13-53,12 참조). 멸시받고 배척당한 ‘주님의 종’이 겪는 고통은 단순히 그 자신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겪는 ‘대속’의 고통으로 제시됩니다. 죄가 없는데도 타인을 대신하여 고통당하고 멸시받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주님의 종. 우리도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을 내놓을 때 이미 ‘주님의 종’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인 55장은 40-54장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빌로니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나오라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출발하라고 촉구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구절에서는 바빌로니아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산과 언덕과 나무들이 노래하고 손뼉 치고 환호하며,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기쁨을 총체적으로 표현합니다.

 

* 황미숙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으로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에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8월호(통권 461호), 황미숙 마리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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