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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예레미야서 - 예레미야의 탄원은 믿음의 고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963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의 탄원은 믿음의 고백

 

 

예레미야 예언서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예언자의 전기(傳記) 자료가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성별되었다고 진술하는 시작 부분부터 동족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간 것을 다루는 마지막 부분까지 그의 삶 전체가 예레미야서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소명 역시 그가 존재하기 시작한 첫 순간부터 그의 삶 전체를 포괄합니다.

 

예레미야는 온몸을 바쳐 예언직에 투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하느님께 올린 탄원과 기도, 예언직을 수행하며 겪은 고통과 내면 체험은 그의 온 생애가 예언직에 봉헌되어 예언서를 형성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서를 읽을수록 예언자가 자신의 소명을 성취하는 일은 일정 기간만 행하고 그치는 한시적 업무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 전체를 투신하여 종신토록 수행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삶 전체가 예언직에 봉헌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그가 전한 말씀뿐 아니라 그 말씀의 전달자를 중시하고 그에게 크게 관심을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예언직을 수행하며 토로한 솔직한 고백과 내면 체험을 꼽자면 11-20장에 등장하는 다섯 편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 참조)일 것입니다. 한 예언자의 고뇌와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안다는 것은 그가 전한 예언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 체험을 살펴볼 수 있는 다섯 편의 고백록을 통해 예레미야라는 사람과 그가 전한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록(11,18-12,6 참조)

 

‘고백’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숨겨둔 절절한 사랑과 굽히지 않는 충정을 상대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전하려는 노력이 떠오릅니다. 고백은 단순히 말로만 전달되지 않고 글과 노래와 춤 등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드리는 예레미야의 절박한 고백은 색채가 다소 다릅니다. 탄원과 탄식, 의혹과 신뢰, 감사와 고뇌로 어우러져 마치 ‘탄원 시편’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 그분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분께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를 밝히고,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과 불충함에 대한 대가로 재앙을 당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11,4-17 참조). 백성의 불충(不忠)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하느님을 향해 절규하는 첫 번째 고백록은, 두 번에 걸친 탄원(11,18-20; 12,1-4 참조)과 그 탄원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11,21-23; 12,5-6 참조)으로 구성됩니다. 하느님과 예레미야가 대화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첫 번째 고백록은,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적들의 계획을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시어 그 계획이 성공하지 못한 데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11,18 참조). 이어 예레미야는 자신이 처한 불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적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 탄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 같았습니다”(11,19). 이는 예레미야가 자신은 어린 양처럼 연약하고 순진하며 무죄하고 악의가 없기에 동향인 아나톳 주민들이 그를 없애려는 끔찍한 음모를 꾸밀 줄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는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11,20)라고 하느님께 복수를 요청합니다. 이러한 복수 요청은 특이하게도 다섯 편의 고백록에서 모두 나타납니다(11,20; 15,15; 17,18; 18,21-23; 20,12 참조). 이는 예언자를 없애려고 불의한 음모를 꾸미는 이들에게 항거하여 복수하려는 마음을 접은 어린 양처럼 무죄하고 약한 사람이, 누구보다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의탁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토로하는 절규입니다. 하느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행하시는 복수는 곧 정의를 회복하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12,1)라는 예레미야의 질문은 ‘왜 착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악인들이 행복을 누리느냐’는 의미로, 구체적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탄원입니다. 이는 현시대에도 하느님께 계속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놀랍게도 두 가지 질문으로 대답하십니다(12,5 참조). 이 응답은 욥 38-41장에 나오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곧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와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어(이사 55,8-9 참조) 행해지는 하느님의 계획에 부당하다고, 왜 그러시냐고, 그 이유를 밝히시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놓치지 않고 사랑과 정의를 끊임없이 실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국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은 ‘믿음’이라는 문제로 종결됩니다.

 

 

예레미야의 나머지 고백록

 

예레미야는 두 번째 고백(15,10-21 참조)에서 백성을 위해 전구하거나 그들을 위로하지 않습니다. 임박한 심판, 곧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의 파괴를 선포하여 사람들에게서 고립과 소외를 당하고 박해받게 된 자신의 운명을 하느님께 탄원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먼저 ‘그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는,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살과 피로 체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언자는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뿐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도 그분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하기에 그것조차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고백(17,12-18 참조)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앞의 고백록과 달리 하느님의 응답이 나타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하느님께 구원되기를 희망하며 올리는 탄원만 서술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치유’와 ‘구원’을 청하는데, 치유와 구원은 회개를 전제합니다.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유일한 길인 회개는 치유와 구원의 길로 접어드는 시작점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무응답은 네 번째(18,18-23 참조)와 다섯 번째 고백록(20,7-18 참조)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더 깊은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다른 고백록과 공통되고 유사한 점이 많은 네 번째 고백에 이어 등장하는 다섯 번째 고백록은 고백록 가운데 예레미야의 소명 설화와 가장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극렬한 내면의 고통이 잘 표현된 마지막 고백록에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등 상황이 사뭇 장황하게 전개됩니다. 전반부에 묘사된 고백을 보면 예레미야가 소명에 따라 충실히 행한 예언 활동 전체가 시련과 모욕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극심해진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는 하느님께 강렬하게 부르짖습니다.

 

고백록 전체가 탄원으로 일관하지 않고 신뢰와 감사의 내용도 담고 있지만, 첫 구절부터 하느님의 꾐에 넘어갔다는 한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고뇌가 가득한 탄식으로 마무리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누구보다 고난과 슬픔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직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예언직에 수반되는 어려움과 고통을 탄식의 말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진솔한 탄식은 그의 인간미뿐 아니라 깊은 고뇌까지 느끼게 합니다.

 

고백록에 수록된 탄원과 절규, 의혹과 불안, 신뢰와 감사 등은 예레미야가 소명을 이뤄 가면서 겪는 체험과 위기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마지막 고백록뿐 아니라 그 밖의 고백록도 예레미야의 소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거부하고 박해한다 해도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신분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선호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명에 투신하여 겪은 고난과 박해는 우리에게도 가능한 길입니다.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는 박해를 겪으면서도 자기에게 몰입하지 않고 하느님만 바라보았기에 탄원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탄원은 오히려 ‘믿음의 고백’이 됩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고통 가운데 호소하는 우리의 탄원도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는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 황미숙 수녀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소속으로 영원한도움 성서연구소에서 소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1월호(통권 464호), 황미숙 마리루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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