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나훔서] 위로자 나훔 누구나 어린 시절에 무엇인가에 놀라 겁에 질렸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면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달래면서 아이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향하여 혼내거나 쫓아내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안심하고 울음을 그칩니다. 아이가 두려워하는 대상보다 부모의 힘이 더 크다고 믿는 아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훔 예언서를 가만히 읽다 보면 공포에 짓눌린 어린아이를 안심시켜 주는 어머니처럼, 유다 백성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려고 애쓰는 예언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인데, 사실상 예언자는 ‘위로를 주는 이’입니다. 위로를 주는 이 나훔의 메시지가 왜 위로가 되는지 알려면 예언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3장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예언서의 주된 내용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의 멸망에 관한 것입니다. 니네베는 기원전 612년에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이 예언은 분명히 그 전에 선포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일까요? 3,8-10은 기원전 664년에 이집트의 테베가 아시리아 전성기의 마지막 임금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침략과 약탈을 당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테베는 완벽하다고 할 만큼의 방어벽을 갖추었고, 에티오피아와 풋, 리비아의 협력을 받는 이집트의 으뜸가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시리아에 의해 공략되었다는 사실은 아시리아의 가공할 만한 힘을 온 세상에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아시리아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이 사건은 더욱 큰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만약 나훔의 메시지가 이 사건 직후에 선포된 것이라면, 그의 메시지는 분명히 유다 백성에게 커다란 위로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 복수하시는 주님” 나훔 예언자는 공포에 질려 있는 유다 백성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하여 먼저 하느님에 관한 노래(1,2-8)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시의 각 연을 시작하는 단어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타나는 알파벳 시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에서 열한 번째 글자인 카프까지만 나오는 불완전한 알파벳 시편입니다. 예언자는 이 노래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힘을 상기시키며,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약자의 편이 되시어 약자가 당한 고통을 되갚아 주는 복수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래의 첫 구절인 1,2에서 예언자는 하느님을 “질투하시는 하느님, 복수하시는 주님, 복수하시는 주님, 분노의 주. 주님은 당신의 적대자에게 복수하시고, 당신의 원수에게 분노를 쏟으시는 분”(필자 직역)이라고 노래합니다. ‘복수’라는 단어가 한 절 안에 세 번이나 사용될 만큼 하느님의 분노에 찬 복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언자가 이토록 강력하게 하느님의 복수를 강조하는 것은 아시리아의 지배 아래 고통받는 유다 백성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함이지 하느님이 그렇게 잔인하고 무서운 분이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덧붙여 말합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의 복수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거두신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홍수로 끝장내시고, 당신의 원수들을 저 깊은 어둠으로 쫓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8 참조). 예언서의 첫째 단락이 유다 백성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힘에 관한 노래라면, 둘째 단락(1,9-2,3)은 유다와 니네베에 관한 신탁입니다. 이 단락에는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 신탁과 유다를 위한 구원 신탁이 교대로 나타납니다. 1,9-11이 아시리아를 향한 심판 선언이라면 1,12-13은 유다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1,14은 다시 아시리아를, 2,1은 유다를 향한 신탁이고, 2,2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선언하는 말이며, 2,3은 유다를 위로하는 말입니다. 이는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엄마가 아이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 아이를 괴롭히는 가상의 원수를 혼내기 위해 어둠을 향해 호통치기를 번갈아 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이 신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시리아가 유다에게 저지른 만행은 곧 주님을 거스른 행위이기에 주님께서 손수 나서 그들을 끝장내실 것이며, 유다는 아시리아의 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셋째 단락(2,4-14)은 아시리아의 패망에 관한 예언이고, 넷째 단락(3,1-19)은 멸망한 도성 니네베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두 단락은 지금 유다를 괴롭히는 아시리아가 주님의 손에 의해 반드시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림처럼 그려 보임으로써 유다 백성에게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예언자가 그려 보이는 아시리아의 멸망에 대한 그림에는 아시리아 군대의 잔인함과 위압적 힘을 목격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4-7은 니네베를 공격할 주님의 군대에 대한 묘사인데, 이는 수많은 성읍을 공략했던 아시리아 군대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자주색 갑옷과 붉은 방패, 화살막이와 번쩍이는 병거, 날카로운 창은 아시리아 군대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물로 둘러싸인 성읍마저 공략한 아시리아의 수병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공기주머니를 사용하여 지하의 수문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성읍을 점령하곤 했습니다. 주님의 군대를 묘사하는 이 단락은 하느님께서 아시리아군이 다른 성읍들을 점령할 때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니네베를 공략할 것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로 둘러싸인 도성 니네베는 점령될 것이며, 아시리아 군대가 다른 성읍에서 한 것처럼 그곳의 왕후는 끌려 나가고 시녀들은 이를 두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2,8 참조). 그 도성에 보관된 모든 금은보석은 약탈당하고, 폐허가 된 도성을 보고 모든 이가 기막혀 할 것입니다. 아시리아 궁정의 최대 오락인 사자 사냥을 위해 사자를 사육하던 사자 굴도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며, 병거는 모두 불에 타고 아시리아의 모든 영화는 사라질 것입니다. 멸망한 도성 니네베를 묘사하는 마지막 단락(3,1-19)은 아시리아 군대가 다른 성읍들을 점령하였을 때 행한 잔혹한 행위가 그 도성에 고스란히 재현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도성은 피로 물들어 도처에 살해된 주검이 널리고, 노략질은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산산이 흩어지고 귀족과 고관들은 포로가 될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요새들이 다 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군대가 무력해지면 하늘의 별만큼 많던 상인, 수비병과 관리, 목자와 군관도 사라져 도성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시리아의 악행에 시달리던 주변 민족들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두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 나훔은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강자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던 유다 백성이 그 시대를 주님에 대한 굳건한 희망으로 지탱해 갈 수 있도록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예언자입니다. 비록 적들이 사자처럼 크고 두려울지라도 주님께서 기필코 승리하신다는 신앙의 확신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과연 나훔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기원전 612년에 니네베는 바빌론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아시리아의 영화는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참된 주인이 누구인지 알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악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악은 종종 그가 사용한 수법대로 멸망한다는 역사의 증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훔 예언자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복수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김영선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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