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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말씀과 함께 걷는다: 스바니야서 - 득달같이 닥쳐올 주님의 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4,930 추천수0

[말씀과 함께 걷는다 – 스바니야서] 득달같이 닥쳐올 ‘주님의 날’

 

 

성경과 그 배경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로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오늘 함께 읽게 될 스바니야 예언서도 그렇습니다.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득달같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포하는데, 그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1,15)이라고 말합니다.

 

누가 이런 날을 고대하겠습니까? 우리를 두려움으로 떨게 만드는 이런 날이 ‘주님의 날’이라면 아무도 그런 주님을 맞이하러 나서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바니야 예언자의 메시지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예언은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된 것입니다. 예언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스바니야 예언자가 활동한 시대가 어떠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 왜 그런 메시지를 선포하였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예언자를 통하여 그러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셨는지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메시지를 지금 내 삶에, 우리 시대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에 회의적인 백성을 향하여

 

스바니야 예언자가 예언자로 소명을 받게 된 때는 기원전 630년경이었습니다. 유다 임금 므나쎄의 아들 아몬이 임금으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반(反)아시리아파 관리들에 의해 살해되어, 여덟 살 난 요시야가 임금으로 등극한 뒤였습니다. 유다 임금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였던 므나쎄(기원전 697-642년)는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 정책의 영향 아래 일관된 친(親)아시리아 정책을 펼쳤습니다.

 

므나쎄의 오랜 통치는 스바니야 예언자가 지적한 대로, 유다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종교적 혼합주의가 만연하여 아시리아의 천체 숭배가 도입되었고, 암몬족의 신 밀콤을 숭배하는 이들도 있었으며(1,5 참조), 가나안의 신들도 숭배되었고, 거짓 예언자들의 활동과 사제들의 타락도 나타났습니다(3,4 참조). 관리들은 외국의 풍습을 모방하고(1,8 참조), 폭력과 사회 불의가 어디서나 목격되었습니다(1,9; 3,1-3 참조). 사람들은 하느님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신앙에 회의를 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은 선을 베풀지도 않고 악을 내리지도 않으신다”(1,12)고 말하며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돌아선 자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주님에게 문의하지도 않는 자들”(1,6)이 생겨났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어떤 교훈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 자들이 많았습니다(3,2 참조).

 

이렇게 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를 향하여,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나 하는가? 그분이 정녕 역사의 주인이신가? 역사는 그저 힘센 자들의 손에 의해 엮이는 것이 아닌가?’ 이런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이들을 향하여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당신의 권능을 온전히 행사하실 그날, 주님의 날이 곧 닥쳐 올 것임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날’은 이미 예언자 아모스가 선포한 바 있습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아모스가 선포했던 주님의 날 개념을 더욱 확장시킵니다.

 

 

주님의 날

 

주님의 날은 모든 것이 땅 위에서 말끔히 쓸려 나가는 날, 곧 창조의 붕괴가 이루어지는 날이요(1,2-3 참조), 온갖 악인과 죄인이 심판 받고 멸망하게 되는 날이며, 총체적 전복과 공포와 파멸, 우주적 대이변이 일어나는 때가 될 것입니다(1,14-18 참조). 이때 우상 숭배자와 주님을 멀리한 자들, 폭력과 속임수에 가담한 자들, 외국 풍습에 젖은 자들, 정치 지도자들과 상인들, 살아 계신 주님을 부정하는 자들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날에는 필리스티아와 모압, 에티오피아와 아시리아, 예루살렘이 모두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2,4-3,8 참조). 주님의 법을 실천하는 정의롭고 겸손한 이들만이 그 화를 면할 것입니다(2,3 참조).

 

스바니야가 선포하는 주님의 날은 무차별 살상의 날이 아니라 세상의 악이 제거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는 곧 다가올 주님의 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2,3) 하며 호소합니다.

 

주님의 날은 어둡고 두렵기만 한 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상의 죄악과 교만을 제거하시는 그날이 오면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예배하러 밀려들 것입니다(3,9-10 참조).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은 주님 안으로 피신하여 평화와 안녕을 누릴 것입니다(3,12 참조). 그들 가운데는 더 이상 불의와 거짓이 없을 것(3,13 참조)이며,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 계시면서 예루살렘을 두고 기뻐하실 것(3,14-18ㄱ 참조)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불행과 억압이 영원히 사라질 것(3,18ㄴ-19 참조)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는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모두 불러 모으시고, 그들의 운명을 되돌리시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다시 칭송과 명성을 얻게 해 주실 것입니다(3,20 참조). 그렇게 되면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도 주님을 숭배하는 자들이 선물을 가지고 주님께 경배하기 위해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3,10 참조).

 

따라서 스바니야 예언자가 선포한 주님의 날은 지구 종말의 날도 아니고 세상과 역사가 끝나는 날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사악함과 불의가 종식되는 날이요, 세상이 정화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통해 정화된 남은 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입니다.

 

 

내 생애 마지막 날에는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방관하고 계신다고 여기고 멋대로 불의와 억압을 행사하며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이들과, 약하고 보잘것없는 민족을 힘으로 제압하는 나라들을 향하여 그들의 악이 심판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살 길을 찾으라는 호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예언자는 세상의 불의에 물들지 않고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승리를 고대하는 아나윔(주님의 가난한 이들)을 격려합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그런 날들이 곧 올 것이므로 현재 걷고 있는 길에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이제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더 이상 당혹스럽지도 낯설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는 어디엔가 꼭꼭 숨어 있기만 한 듯합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하느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우리는 어디서나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주님의 날은 있지도 않을 것처럼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바니야가 말한 것처럼, 분명히 선택의 기회가 언제까지나 주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제 행위를 수정하거나 바로잡을 수 없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기에 매일 준비해야만 합니다. 내 생애의 마지막 때에 내 손에 들려 있게 될 자화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하면서….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9월호(통권 474호), 김영선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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