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읽기] 에돔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오바 1) 오바드야서는 총 21절로 되어 있어 구약성경에서 가장 짧습니다. 그나마 내용도 에돔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고 죄악에 대해 꾸짖는 것이 전부라서 흔히 가까이하지 않는 예언서입니다. 어쩌다 마음을 잡고 읽어 보려해도 예언서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건너뛸 수는 없지요. 무엇이 들어 있나 한 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오바드야? 1절에 “오바드야의 환시”라고 되어 있을 뿐, 이 책에서는 저자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유다교 전승에서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오바드야’라는 이름을 찾아, 1열왕 18장에 나오는 주님을 깊이 경외한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드야가 이 책의 저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매우 약합니다. 오바드야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오바드야서의 내용이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론의 공격으로 무너질 때에 에돔인들이 저지른 일을 비난하고 있으므로 예언자 오바드야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활동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 문제는 다른 면에서도 제기됩니다. 한 사람이 전체를 다 쓴 것으로 보지 않고, 끝 부분이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봅니다. 1절의 머리글이 나온 다음 2-15절에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는 데에 비하여 16-21절에서는 에돔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15절까지만 본래 저자가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좀 더 너그럽게(?) 18절까지를 본래 저자의 것으로 보고 19-21절을 첨가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결국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말하기 어렵지만 먼저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있었고, 그 후에 에돔이 모든 민족들의 본보기로 간주되어 본문 내용이 확대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2-9절은 예레 49,7-16과 거의 일치하기에 또 문제가 됩니다. 예레미야가 오바드야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해서 오바드야서의 작성 연대를 고대로 더 올려 잡는 이들도 있지만,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레미야와 오바드야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오바드야 모두 또 다른 어떤 자료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요? 21절짜리 짧은 글이라고 해서 저자 한 명이 단번에 썼으려니 생각하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모든 예언서는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되었고, 오바드야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돔? 다음 질문은 에돔에 대한 것입니다. 예언서 가운데 다른 여러 민족을 거슬러 심판을 선고하는 책은 여럿 있지요. 그 선고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결국 이스라엘에 대해 선포할 말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바드야서는 에돔에 대한 심판 선고가 거의 온전히 책 전체 내용을 이룹니다. 아시리아나 바빌론 같은 강대국도 아닌 에돔에 대해 왜 그렇게 심판을 선고할까요? 구약성경 여러 곳에는 유다와 에돔의 적대 관계를 표현하는 본문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2-9절과 거의 일치하는 예레 49,7-16을 제외하면 오바드야서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시편 137일 것입니다. 유다와 에돔은 형제이면서 계속 갈등을 겪어 온 관계였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에돔의 조상 에사우의 관계를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합니다. 야곱과 에사우는 쌍둥이면서 모태에서부터 서로 다투었다고 하지요(창세 25,22 참조). 야곱이 형 에사우에게서 맏아들 권리를 빼앗은 이야기,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마지막 축복까지 가로챈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과 에돔은 계속 다투었습니다. 유다는 남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에돔과 싸웠지만, 특히 에돔의 광산을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다윗은 에돔 사람 만 팔천 명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2사무 8,13-14 참조). 오랜 기간이 흘러서야 에돔은 다시 독립하여 자신의 임금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2열왕 8,20-22 참조). 이 이야기를 다 들려드리는 것은 에돔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에돔에게도 원한이 사무쳤을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에돔이 “옛날부터 적개심을 품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환난을 당할 때, 그들이 마지막 벌을 받을 때, 그들을 칼날에 넘겨 버렸다”(에제 35,5)고 말합니다.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12절) 이렇게 고대부터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배 후에 에돔을 비난하는 여러 본문이 생겨나게 된 계기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에돔이 바빌론 군대와 연합하여 유다를 황폐화하는 데 한몫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가 멸망하자 에돔은 기뻐하면서 그 틈을 타 헤브론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오바드야는 “너는 네 아우의 날을, 그 재난의 날을 흐뭇하게 바라보지 말아야 했다”(12절)고 말합니다. 시편 137에서는 바빌론과 함께 에돔을 저주하며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시편 137,7)라고 부르짖습니다. 오바드야가 편파적이라고 느껴집니까? 에돔이 옛 원한을 품고 형제의 멸망을 기뻐하는 것이 나쁘다면, 그런 에돔에게 “네가 한 그대로 너도 당하고 너의 행실이 네 머리 위로 돌아가리라”(15절)고 말하는 잔인함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였다는 것은 어떻습니까?(1열왕 11,15 참조) 형제가 원수가 되면 어떤 원수보다 더 무서워지는 것인가요? 오바드야서를 읽으며 느끼는 이러한 불편함에 대해 어떤 이는, 그렇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오바드야에게는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오바드야는 다윗 시대가 아니라 기원전 6세기에 살았고, 우리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우리의 관점에서 오해하여 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바드야는 뭔가를 고발합니다. 단지 에돔이 나쁘다는 것뿐 아니라 에돔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뒤에 있는 어떤 악을 고발합니다. 폭력의 순환, 끝없는 보복. 어느 순간에는 그것이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새로운 미래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편에서 먼저 보복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에돔에게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바드야서의 한계일 것입니다. 에돔에게 그 악이 그대로 돌아가기를 기원하지 않고 이스라엘 편에서 멈추었다면 더는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았겠지요. “주님의 날”(15절) 오바드야가 선포하는 주님의 날은 악의 순환을 끝내는 날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이 복수를 계속하고 있다면, 주님의 날이 올 때 심판은 에돔에게만 내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순간에 이스라엘이 에돔에게 다시 복수를 하고 있다면 주님의 날은 이스라엘의 복수를 중단시키는 날이 될 것입니다. 오바드야서를 두고 이스라엘은 항상 옳고 에돔은 항상 그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른 것은 복수하는 쪽입니다. 그 복수가 멈추는 날, “구원받은 이들은 시온 산으로 올라와 에사우 산을 다스리리니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가 되리라”(21절). 이것이 오바드야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렇게 오바드야서의 예언은 에돔의 멸망으로 끝나지 않고, 시온에 주님의 나라가 서는 것으로 끝납니다. 에돔에 대한 저주라는 주제가 구약의 다른 부분에도 나온다면, 시온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모여들게 되는 것 역시 여러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대표적 예로 이사 2장; 즈카 14장 등). 이러한 본문의 문맥에서 시온 산에 세워질 주님의 나라는 불의와 폭력, 악에 대한 심판이 있은 다음에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분쟁이 그치지 않는 그 땅을 기억하며 평화를 기원합니다. 오바드야를 탓하기보다 우리 시대의 모습이 어떤지 짚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5년 3월호(통권 468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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