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말씀 피정 (2) 창세기 ‘그리고’ 탈출기 지난 호에서는 탈출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탈출기 시작 부분(1,1-14)을 간략하게 알아본 다음, 탈출기 이야기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몇몇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고’로 시작되는 탈출기 히브리어로 탈출기는 ‘워엘렛 셔못’(그리고 이것들은 이름들)으로 시작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여기서 ‘워’는 ‘그리고’라는 의미를 지닌 접속사입니다. 이 접속사는 탈출기가 창세기와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요셉은 창세기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 50,24). 이제 탈출기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통해 이야기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하나씩 알려 줄 것입니다. 강해진 이스라엘의 자손(1,1-7) 야곱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자손은 모두 70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땅 고센 지방에 머물렀는데(창세 47,27 참조), 창세 47,11에 따르면 그곳은 이집트 땅에서 가장 비옥한 라메세스 지방으로 오늘날 나일강 하류에 있는 삼각주 지역입니다. 탈출기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매우 번성하고 강해져, 고센 땅 전체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합니다. 탈출 12,37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을 떠날 때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한 장정만 육십만 명쯤 되었다고 전하니, 그 후손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70명의 후손이 사대에 걸쳐 9-10명의 자녀를 둔다면 육십만 명은 충분히 나올 만한 숫자입니다. 이쯤 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 가운데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는 약속이 충분히 이루어졌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는 그 약속이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무수한 그리스도인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로마 4,13-25; 묵시 7,9 참조). 하지만 탈출기의 관점만으로 볼 때 이집트 땅에서 그 약속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입니다. 어찌됐든 탈출기 이후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어떻게 내주시는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파라오 치하에서의 종살이(1,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꼬여 버립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매우 많아지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1,9-10). 그러고 나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려고 자신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인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합니다. 역사상 피톰과 라메세스를 세운 임금은 기원전 13세기경의 라메세스 2세입니다. 실제 그는 국력을 키우기 위해 대규모 공사를 벌이면서 이 두 성읍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탈출 1,8-14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13세기경이 됩니다. 지금까지 탈출기 시작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별 생각 없이 읽다 보면 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읽으면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그중 두 가지만 다루겠습니다. 탈출기에서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의 충돌 창세 15,13-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남의 땅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사대 째가 되어서야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탈출 1,1-7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에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다고 말하는 편이 옳습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다기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종살이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탈출 1,1-7은 창세 15,13-16과 내용상 충돌합니다. 게다가 탈출 12,40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430년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창세기 저자와 탈출기 저자가 달라서 그런 걸까요? 탈출기가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두 저자가 다르다고 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성경을 읽다 보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은 대목을 만나곤 합니다. 이때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니 차이가 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성경의 여기저기를 뒤져 봅니다. 그러나 어떤 해답도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술 당시로 돌아가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충돌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려면 먼저 성경이 어느 한 시기 한 사람에 의해 단 한 번에 적힌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도로 쓰인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걸어온 삶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편집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엮은 책입니다. 어떤 대목은 편집에 참여한 이가 직접 보고 쓴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야기가 구전되거나 글로 전해졌습니다. 게다가 구전된 이야기의 경우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엮어 성경을 편집하다 보니,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경 편집자들이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가 가진 자료들을 교정하고 편집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가 그때까지 전해져 오던 하느님과 선조들에 대한 내용이고, 후손들에게 오랫동안 그들의 신원을 알려 주며, 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이야기였기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에 존재하는 내용상의 충돌은 단순한 짜깁기의 흔적이 아니라, 전승을 소중히 간직하려던 편집자들의 노력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탈출기 말씀 피정을 하면서 이런 충돌들을 자주 만날 것입니다. 어느 때는 편집자가 일부러 그 충돌을 담아 두기도 하기 때문에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내용상 충돌되는 부분이 나오면 앞뒤를 뒤적이면서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만 집중하면 성경이라는 전체 그림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아주 엉뚱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이건 사용한 전승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거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전체를 천천히 읽다보면 이해하지 못한 충돌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어법, 아이러니 탈출 1,10을 보면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뜻에 맞추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지혜롭게 다룬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다룬다’는 말입니다. 물론 파라오가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1,10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 15,13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이라고 알려 주신 바 있는데, 새 파라오는 하느님의 이 계획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파라오는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파라오는 자신과 이집트 백성을 위해 이스라엘을 억압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참으로 지혜로운 행동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특별한 생각 없이 아이 이름을 지었는데, 그 이름대로 아이의 운명이 진행되기도 하고(모세: 탈출 2,10 참조),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세운 계획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에스 7,10 참조). 성서학자들은 이런 것을 ‘반어법(irony)’이라 부릅니다. 반어법은 본래 ‘참, 잘했다’ 같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실제 의도하는 의미(‘일을 뭐 이따위로 했어?’)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탈출기를 읽을 때 등장인물이 던지는 대사에서 반어법이 쓰인 대목을 찾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이나 성경 언어에 대한 지식, 구약성경 전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반어법을 찾아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피정을 진행하는 중간 중간에 반어법이 발견되면 여러분에게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만날 때까지 탈출 1장과 2장에 나오는 반어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2월호(통권 455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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