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말씀 피정 (6)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다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왕궁을 떠나 동족의 처지를 알고 난 뒤, 동족의 판관이요 지도자 노릇을 하다 크게 실패한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건너가 미디안 사제 이트로, 곧 르우엘의 딸과 혼인한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미디안에 자리 잡다 2,15의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고 일부러 우물가에 앉아 있던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기다리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느낌이 조금 달라집니다. “모세는 파라오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미디안 땅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떤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이 번역에 따르면 모세가 미디안 땅에 자리 잡았다는 표현은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게 된 이야기의 결말이면서 새 이야기를 여는 일종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종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내려가서 한 우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가 일곱 여인을 도운 것이 우연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이 밝히듯 모세가 우물가에 간 행위는 분명히 의도된 것입니다. 이 점은 모세와 르우엘이 만나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미디안족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난 뒤 크투라에게서 열두 아들을 보는데, 미디안은 그중 네 번째 아들입니다(창세 25,2 참조). 미디안은 이사악과 배다른 형제입니다. 이 미디안에게서 나온 미디안족이 탈출기 시작 부분에서 모세를 도와주는 부족으로 그려집니다. 미디안족이 매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미디안족은 대개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트리는 민족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창세 37,28에서는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넘김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땅으로 내려가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민수기 이후에는 이스라엘과 매우 적대적 관계를 형성합니다(민수 22-23장; 31장 등 참조). 기드온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민족으로 등장합니다(판관 6-8장 참조). 모세의 장인과 부인이 미디안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아이러니한 모양새입니다. 특히 모세가 미디안 여인과 혼인하게 되었다는 것을 신명기 관점에서 평가하면 상황은 더 아이러니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준 이방 여인과의 혼인 금지 규정 때문입니다(신명 7,1-26 참조). 이 규정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정착할 때 우상 숭배라는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 혼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합니다. 물론 미디안족이 가나안의 일곱 부족에 속하지는 않지만, 모세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다는 사실은 모세에게 다소 부정적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탈출기는 이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어쩔 수 없이 이방 여인과 혼인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게다가 모세의 장인 이트로가 ‘르우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전합니다. ‘르우엘’은 ‘하느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탈출기는 이 이름을 통해 독자들이 모세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듯합니다. 탈출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모세의 장인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르우엘이 ‘하느님의 친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주인공 모세를 도와주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하느님을 처음 만납니다. 르우엘, 곧 이트로는 모세에게 우상 숭배를 가져다 준 이방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 이방인입니다. 우물가에서 성경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우물가에서 장래의 아내를 만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창세 24장; 29,1-14; 탈출 2,15-22 참조). 이사악의 아내를 동족 가운데서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났습니다. 에사우를 피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친 야곱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는 모세가 우물가에서 치포라를 만납니다. 이 이야기들을 비교해 보면, 여자나 남자 한 쪽이 상대방을 위해 또는 양 떼를 위해 물을 길어 줍니다. 그러고 나서 여인은 자기 가족에게 이방인의 도착을 알리고, 가족은 그 이방인을 받아들여 혼인 서약을 맺습니다. 자칫 식상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각각의 이야기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2,16-17은 미디안의 사제 르우엘의 딸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자, 목자들이 방해를 했다고 전합니다. 근동 지방에는 우물이 흔하지 않고 수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목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모여 함께 우물 덮개를 열고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우물가가 좁다 보니 모든 목자가 한꺼번에 물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양 떼를 치던 힘없는 여인은 다른 목자들이 물을 먹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점은 딸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 르우엘이 한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왔느냐?”(2,18) 모세가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여인들은 그날도 평소처럼 다른 목자들이 모두 물을 먹일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여인들을 도와 양 떼가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일종의 호의를 보인 것입니다. 모세의 신원 모세가 우물가에서 미디안 땅에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를 기다린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여인들을 기다려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모세가 여인들을 도와준 뒤에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모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에 이집트에서 보인 모습(2,11-12 참조)과 같습니다. 만약 모세가 다른 목자들을 도와주었다면, 그들이 모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목자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이를 도와줍니다. 이런 모세에 대해 르우엘의 딸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주고, 우리 대신 물까지 길어서 양 떼에게 먹여 주었습니다”(2,19). 여인들을 목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고 물까지 길어 양떼를 먹이는 이미지는,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면서까지 보호하신 하느님의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어렴풋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르우엘의 딸들은 모세를 ‘이집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미 이집트를 떠났지만, 여전히 이집트 사람으로 남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40년 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3,6).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이집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십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원을 되찾게 됩니다. 모세의 혼인 르우엘은 왜 모세를 내버려두고 왔느냐고 딸들에게 핀잔을 줍니다. 그러고는 모세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모세가 그 사람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살기로”(2,21) 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뭔가 비는 부분이 생깁니다. 르우엘이 모세에게 함께 살기로 청한 뒤 모세가 그 청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성경에는 르우엘이 모세에게 그런 청을 하는 대목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들여다보면, 우리말 성경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그 사람과 함께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 딸 치포라를 모세에게 주었다.” 르우엘이 모세에게 청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르우엘과 함께 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모든 이야기가 명확해집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모세는 어쩔 수 없이 우물가에 간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줄 이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모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여인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여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고자 우물가에 앉아 기다립니다. 르우엘은 이런 모세를 초대해 음식을 나눕니다. 고마움의 표시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기회로 삼아 르우엘에게 함께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르우엘이 그 청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딸 치포라를 아내로 내줍니다. 모세는 아내에게서 게르솜이라는 아들을 낳고, 그 땅에서 40여년을 머무릅니다. 삶은 한 판의 바둑 모세를 보면 ‘삶은 한 수 한 수 두어 가는 바둑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라는 한 판의 바둑에서 모세는 잘못된 수를 둡니다. 이집트에서 자신이 메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나섰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판 전체를 포기하지 않고, 잘못 둔 그 수를 바탕으로 미디안 땅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40년 동안의 수읽기 때문이었을까요? 40년 뒤 모세는 결국 그 땅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완전히 변화하여 살게 됩니다. 잘못된 수에 빠져 바둑판 전체를 실패로 마무리하지 않고, 판세를 완전히 바꿔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역시 반집만 이겨도 판 전체를 이기는 바둑과 같습니다. 모세처럼 잘못된 수를 두었다 해도 거기서 새로운 수와 변화를 모색해 간다면, 바둑판 전체를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2,15-22을 읽으며 깨닫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6월호(통권 459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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