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말씀 피정 (9)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노력 지난 호에서는 모세가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주저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소명을 받아들여 이집트로 돌아가는 장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소명을 수락함 모세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팁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다양한 징표를 주십니다. 곧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시고, 기적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게다가 함께 일할 조력자도 내주십니다. 그러나 모세가 받은 가장 큰 징표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3,12 참조). 그분은 아론을 조력자로 주시면서 다시 한 번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 내가 너희를 도와주겠다.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가르쳐 주겠다”(4,15) 하시며 모든 것을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눈 뒤 모세는 즉각 반응합니다(4,18 참조). 그는 하느님 말씀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즉시 장인 이트로에게 가서 이집트로 돌아가 자기 친척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앞서 주저하던 모습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모세의 멘토 이트로 모세가 이트로에게 귀향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자, 이트로는 평안히 가라고 하며 그의 길을 축복해 줍니다. 모세를 거두고 딸까지 내주며 보살핀 은인 이트로의 처지에서 보면, 40년이나 의지하며 함께 지낸 모세가 떠나는 것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트로는 더 큰 일, 곧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세를 기꺼이 보내 줍니다. 야곱이 떠날 때 라반이 보여 준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창세 31장 참조). 훗날 이트로는 모세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 앞에서 음식도 나누어 먹습니다. 이방인인 미디안족의 사제였는데도 모세와 함께 여정을 계속 합니다. 이트로가 없었다면 모세도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트로는 모세의 삶의 중요한 시기마다 모세를 도와주고 그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18장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일? 모세의 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면서 모세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디서나 그를 보살펴 주고, 그와 함께 모든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나 아론이 말할 때 그들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들의 입에 담아 주겠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따라오기만 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신다 해도 모세 편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을 떠나야 하고 파라오와 이스라엘 앞에서 이적을 보여야 하며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것은 모세가 헤쳐가야 할 일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주저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결정? 모세의 결정? 4,18-4,19을 살펴보면, 모세가 미디안에서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바람인지(4,18 참조), 하느님의 명령에 따른 것인지(4,19 참조) 의아합니다. 그 이유를 오경이 여러 저자의 손을 거친 자료를 엮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계획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 섭리의 관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본당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종종 경험하시겠지만, 아무리 하느님의 일을 한다 해도 그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면 많은 이의 노력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일이니 그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손 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 안에서 그분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때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노력)와 하느님의 섭리(은총)는 서로 다른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루시는 분이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뜻을 거스르는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개념은 전혀 모순되지 않고, 실재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올바른 신앙이 시작됩니다. 두 가지 층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지상적 층위에서 생각하면 모든 일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천상적 층위 곧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뭔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들만이 천상의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4,18과 4,19도 두 가지 층위의 시각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상적 층위에서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실행으로 옮깁니다(4,18 참조).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4,19 참조). 결국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것은 100% 모세의 결정이면서 동시에 100%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다소 이상한 하느님의 계획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이집트 땅으로 돌아옵니다. 40년 만의 귀환입니다. 모세를 알던 이들은 대부분 죽고 없습니다. 다만 그의 형제들이 모세를 알아봅니다. 이런 여정을 떠나는 모세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파라오 앞에 가서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데, 파라오는 그 기적을 보더라도 마음이 완고해져 백성을 풀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계획이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기적을 행하면 파라오가 즉시 두려움을 느껴 이스라엘을 풀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파라오가 백성을 풀어 주지 않도록 하시겠다니 말입니다. 당신의 계획이 방해받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신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다소 아이러니합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내 백성을 내보내지 않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말하였건만, 너는 거부하며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4,21-23). 저로서도 이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데,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뭔가를 지시할 때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일일이 설득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냥 내버려둡니다. 사사건건 학생들의 마음까지 통제하려 들지 않습니다. 학생들보다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선생의 입장에서 그러는 것이 나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파라오의 완고함 때문에 방해받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시면서도,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 기적을 행하게 하십니다. 파라오의 방해 자체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파라오에게 실재를 제대로 보는 계기가 되기에, 파라오의 방해를 그대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파라오는 지상적 차원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합니다. 천상적 차원,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그의 방해마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고 표현하신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어 종종 사람들이 당신 계획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방해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 점을 3,19-20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하느님의 책임? 인간의 책임?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50%를 하면, 나머지 50%는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이나 하느님의 책임을 경감하려는 노력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100%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100%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도 인간도 역사의 어느 한 부분도 그냥 내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100%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100%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짐을 고백하고 허투루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모든 여정이 100% 당신 책임이라 생각하시고, 무엇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납니다. * 염철호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이야기》(공역)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9월호(통권 462호), 염철호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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