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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직업 - 자비로우신 하느님 (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812 추천수0

[일상에서 열매 맺는 예수님의 비유] 직업 - 자비로우신 하느님 (2)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마태 20,1-5).

 

“4박 5일 동안 삼촌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 본 적이 있다. 좁은 공간에서 16시간씩 일하고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알바를 했다. 모 자동차 회사에서 밤샘 노동을 했을 때가 기억난다.” “택배 물건 분류 작업을 했다. 월급이 많지 않았다.”

 

이 나눔은 케빈 페로타의 성경 6주간 교재 ‘비유’ 편 제2주차 시작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시작 질문은 돈 받고 일한 ‘직업’에 관한 것입니다. 직업을 일컫는 우리말 가운데 천직은 vocation으로, 전문직은 profession으로 구분된 영어가 유독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넘어오면 vocation은 부르심 특히 영미권에서 ‘개별 성소자’를 뜻하고, profession은 수도자가 봉헌 생활을 약속하는 ‘서원식’을 뜻합니다.

 

이번 달은 직업을 묵상해 볼 차례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부르려고’ 먼저 집을 나섰다는 사실과 “정당한 삯”(마태 20,4)을 ‘약속’했다는 점이 하위 주제가 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먼저 찾아 나선 이는 주인입니다. 이어서 아홉 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다섯 시쯤에도 포도원 주인이 찾아 나섭니다. 주인은 일꾼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케빈 페로타는 첫 번째 일꾼 무리와 나머지와의 약속을 비교해 보자고 합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첫 번째 일꾼 무리와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습니다. 나머지 일꾼들은 다만 ‘정당한 삯’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삯을 받을 때가 되자 첫 번째 일꾼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그 근거는 받기로 약속한 금액보다 더 받지 않았고, 늦게 온 일꾼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주석서는 하나같이 하느님의 후덕한 자비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정의의 덕이란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1807항)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좀 더 예리하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이다.” 정의는 단순히 재화의 분배 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마땅히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즉 애덕 실천이 아니라, 나의 욕심 때문에 받지 못한 이들에게 그들의 마땅한 몫을 되돌려 주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각에서 시작하기에 아무도 자기 것이라 자랑할 수 없습니다(1코린 4,7 참조).

 

케빈 페로타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한 무리의 일꾼을 고용하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 무리와 품삯을 흥정하였고 그들은 그의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밖으로 나가 일꾼을 고용하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모두 불렀습니다. 그러나 일품을 약속하는 대목은 달랐습니다. “그는 다른 무리들과 품삯을 흥정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에게 ‘정당한 삯을 주겠소’라고만 이야기했습니다”(마태 20,4 참조). 비유에서 품삯을 지불하는 순서가 반대인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청중은 처음 고용되어서 온 종일 일한 사람들이 더 많은 삯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기고 더 많은 돈을 받으리라고 예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이 그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정당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하느님의 시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어젯밤 기상청의 날씨 예보는 충청도 지역에 43년만의 가뭄을 해갈할 단비가 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사 제목은 “내일 중부지방 ‘금비’ 내린다 … 2500억 원 가치”였습니다. 봄비 소식마저 경제 가치로 환산된 것입니다. 정당한 삯을 주겠다는 말씀도 우리의 시각에서 경제 가치로 환산될 듯합니다. ‘공평함’을 합당하게 받아야 할 권리 문제로 접근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의 공정을 이루시고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신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라는 주제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번 달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처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자비 체험에서 이야기를 출발하면, 정의로운 품삯은 자신의 노력에 맞는 평가나 보상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과의 흥정은 말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되돌려 드리는 것이고, 내 죄악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을 못 받은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성취나 노력의 결실이 아닌 하느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판단하는 것이 우리 몫이 아님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을 언제 어떻게 부르시든, 자애를 얼마나 베푸시든 우리는 나를 불러 주신 그 순간에 응답하도록 부르심(vocation)을 받습니다. 자비로우신 분이 당신의 자비를 언제 어떻게 쓰시든 우리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케빈 페로타의 적용 질문에 귀 기울여 봅시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억울하게 느껴진 적이 있습니까?” 성경 나눔을 여러 차례 진행해 본 결과, 대부분은 억울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대답이 도리어 저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늦게 일터에 도착해서 똑같은 급여를 받아 간 동료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 하느님 나라, 즉 구원의 주제와 신앙의 입문 시기에 대해서는 너그러울까요?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기 때문이거나, 신앙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다시 느끼는 점은 사제직이라는 ‘직무’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부르심과 응답’이라는 하느님 체험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각자의 몫대로 불러 주셨고,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알리기 위해 부름 받았으며, 그분께 이미 받은 바를 정당하게 각자의 몫으로 되돌려 주는 데 항구한 의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살겠다고 엎드려 ‘서약(profession)’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며, ‘천직(vocation)’이 하느님의 자비를 위해 부름 받은 것임을 고백합니다.

 

* 최성욱 신부는 부산교구 소속으로 2001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미국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성윤리를 전공하였으며,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역서로 리처드 M.굴라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제자 됨의 영성》(2015) 등이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5월호(통권 470호),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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