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은 신앙만으로 충분한가?
몬타누스파에 빠진 테르툴리아누스 순수한 신앙을 옹호하려 한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도 노력하여 성인으로 존경받을 법한데 왜 ‘성인 호칭 기도’에 그의 이름이 없을까? 여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역동성이 숨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앙에 대한 열정 면에서는 어떤 초대 교부보다 뛰어났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열정, 또는 ‘순수하고 과격한’ 신앙심을 지닌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종종 신앙 때문에 직장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마저 버리고 구원에만 매달린다. ‘휴거’에 대한 예언과 두려움으로 집단 자살까지 이어진 ‘오대양 사건’이 그 예이다. 저 멀리 올라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믿던 이들도 신앙에 대한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주목할 사실은 그들도 우리가 읽고 믿는 성경의 한 구절을 선택하여 절대적 믿음과 복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위험성이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테르툴리아누스의 생애 후반에 분명히 나타난다. 당시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종말에 나타날 여러 현상을 두려워하여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같이 재림을 기다리는 외침을 ‘종말 지연(mora finis)’을 위한 기도로 바꾸어 버렸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며 머지않은 재림을 위한 기도를 고수했다(<기도론> 5,1).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열정을 포기하고 방탕한 이교 문화에 동화해 가는 그리스도인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리고 순수하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던 ‘몬타누스파’가 성경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느꼈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에 침체해 있던 몬타누스파에 가입하여 그들의 교리를 열정적으로 옹호하게 된다. 몬타누스파와 테르툴리아누스 몬타누스파는 2세기 중엽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였다. 종말에 관한 희망과 임박 기대를 바탕으로 교회를 극단적으로 쇄신하려는 예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창시자 몬타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을 운동의 근거로 삼고, 자신을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 14,26; 16,7 참조)의 대변인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세상의 종말을 선포하여 세상을 멀리하고 종말을 준비하라고 권고했다. 그에게 두 명의 여예언자 프리쉴라(Priscilla)와 막시밀라(Maximilla)가 합류했다. 그들은 남편에게서 떠나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황홀경에 빠져 방언과 예언을 일삼았다. 더욱이 막시밀라는 “내 뒤에는 더 이상 어떤 예언자도 오지 않을 것이며, 종말의 완성이 올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죽자마자 묵시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천년 왕국이 프리기아 지방의 페푸자(Pepuza)라는 마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몬타누스파는 많은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부정하고, 성경보다 몬타누스파 예언자들의 권위를 더 높게 평가하였다. 성직자의 권위와 교계 제도를 배척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장시간의 단식과 독신 생활, 세상과의 절연, 자선 행위 등을 요구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성찬식에서 한 살배기 아기의 몸에 바늘을 수없이 찔러 거기에서 나오는 핏방울을 모아 빵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다행히 179년 막시밀라가 사망한 뒤에도 종말이 일어나지 않자 예언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몬타누스파는 뛰어난 조직 관리 능력으로 200년부터 테르툴리아누스가 활동하던 서방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가장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을 선망했다.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 사제들의 위계 질서를 좋아하지 않던 그는 사제 제도를 비판하고 보편 사제직을 주장했다. 결국 207년부터 몬타누스파의 가르침을 옹호하면서 가톨릭교회를 ‘타락한 영혼의 교회’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적대자로 변신했다.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신흥 종교로 개종한 것 같은 충격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211-217년경에 저술한 마지막 작품들에서 몬타누스파의 엄격주의에 따르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처음과 달리 생각을 바꾸어 간음 등의 중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박해를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순교하지 않았으니 배교자라고 몰아세우며 스스로 순교할 것을 권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군에 복무하면 안 되고, 군인과 공무원을 세례 후보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몬타누스파가 지닌 위험성 몬타누스파에서는 성령과 예언자를 강조하는 후대의 운동에서 보이는 위험이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교회 전통을 무시한 채 개별 지도자들의 사적 예언을 성경의 권위 위에 놓는 것은 큰 위험성을 지닌다. 또 영적 순화를 위해 필요한 금욕주의가 지나칠 경우 그리스도교가 지닌 피조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해칠 수 있다. 더욱이 소수의 선택된 자들, 즉 자신의 그룹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구원관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보편된 구원 의지와 상충한다. 이와 반대로 몬타누스파에 반대하며 정통을 자처하는 이들 중에는 몬타누스파가 주된 신학적 근거로 제시한 요한 복음과 요한 묵시록을 영지주의자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정경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나 이레네우스와 클레멘스와 같은 교부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철학 용어를 도입한 테르툴리아누스 성경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앙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은,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외쳤던 테르툴리아누스가 후대에 미친 영향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철학적 기획을 파괴하라고 반(反)철학적 태도를 분명히 밝힌 테르툴리아누스 자신도 이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었다. 신학에 철학자들의 사상을 도입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자신의 신학적 사유 역시 여러 철학적 원전(原典)에 의존하고 있었다. 세속적 지식과 투쟁하기 위해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그는, 많은 철학 이론에 정통하게 되어 평신도 신학자로서 신학 내용과 철학 용어를 접목한 저작을 많이 남겼다.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 계통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자였다. 삼위일체론에서 사용되는 페르소나(Persona, 위격), 숩스탄시아(Substantia, 실체), 나투라(Natura, 본성) 등의 단어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오히려 철학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철학을 신학 안으로 수용하려는 계획을 파괴하라고 외쳤지만, 역설적으로 신학에서 철학이 완전히 무시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비록 생애 후반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에 빠졌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교부에게 섣불리 후대의 기준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가 그의 업적과 과오에서 옳은 부분을 수용하며 정통 교리를 확정해 왔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보여 준 신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보존하면서 이성을 통해 그 열정을 끊임없이 반성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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