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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은총과 자유의 변증법 -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의 논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5,721 추천수0

[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은총과 자유의 변증법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의 논쟁

 

 

인간은 진리가 담긴 성경과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선한 의지만 있다면, 과연 동일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성경에 담긴 소중한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 주는 유명한 신학적 논쟁이 있다. 바로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은총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이를 위해 인간의 공로가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아우구스티노 주교와 펠라지오가 벌인 논쟁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원죄론에 의거한 필수적인 은총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극적인 개종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은총을 절실히 체험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서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신이 좋다고 인정한 규범에 따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4-15).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 설화에 바탕을 두고 원죄론(原罪論)을 체계화했다. 근원적인 악과 고통은 각 개인의 잘못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창조 질서를 거스른 원조들의 죄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와 같은 구절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인간의 정욕(concŭpiscéntĭa)이 널리 퍼짐(propágatĭo)으로써 세세대대로 건네지는 원죄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선한 본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 본성과 공로에 대한 펠라지오의 긍정적인 평가

 

이러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론은 북아프리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펠라지오(Pelagius, 360?-420?년)와 그 추종자들이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영적인 상담자로 유명하던, 영국 출신 펠라지오는 금욕적 호소와 도덕적 성경 해석을 통해 진지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을 제시했다. 그는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에페 5,27) 교회상을 제시하며, 급속히 늘어난 신자 수로 인해 나타난 무미건조한 신앙과 도덕적으로 이완된 경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펠라지오는 여행 중에 체험했던 동방의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에 따라 인간의 본성을 아우구스티노보다 훨씬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곧 그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본디 계명을 지킬 수 있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아우구스티노에게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주장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송두리째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더 나아가 펠라지오는 아담의 죄도 세세대대로 넘어가는 원죄가 아니라 단지 아담 개인이 지은 죄로 보았다. 죄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아담이 끔찍한 예를 만들어 놓은 이후 발생한 사회적 습관의 결과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굳은 의지로 아담을 모방하려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신의 공로(merita)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보았다.

 

 

십자가의 은총과 유아세례를 두고 벌인 논쟁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비판을 펠라지오의 제자들을 통해서 접하게 되었고, 그의 사상 안에는 ‘위장된 자기 구원론’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오의 이런 매우 위험한 논리에 따르게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의미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만약 “인간이 오직 피조물의 본성과 자유로운 의지 결정을 토대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아 구원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아들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선을 행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에 앞서는 ‘은총’이 필요하고, 원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세례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유아세례’를 옹호했다.

 

이에 대해 펠라지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이 확산된다면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인간의 능력은 완전히 무시되고, 동시에 신의 은총은 ‘값싼 은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다시 비판했다. 그들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당시 차츰 더 늘어가는 유아세례를 거부했다. 그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은총을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빛을 주셨으므로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차 하느님께서 모두 도맡아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아우구스티노가 보기에 이런 입장은 은총의 중요성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이나 생활 방식, 소위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강제로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진정 절대자라면, 그분의 구원이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그에겐 불합리한 일이었다(《서간집》 214,2). 따라서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아무도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행한 모든 공로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월계관을 씌워 주신다면, 그분은 당신의 선물에 월계관을 씌우신다”(《서간집》 194,5).

 

 

성경 해석에 대한 논쟁이 주는 교훈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 사이의 논쟁은 그들이 사망한 뒤에도 양측의 옹호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마침내 529년에 펠라지오의 견해가 교회에 의해 단죄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논쟁이 진행될수록 아우구스티노는 “자유로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의 운명을 예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후대의 신학적 결정론에 빌미를 마련해 주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 모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이 담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밝히려 노력했지만,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둘 다 제시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논쟁 과정에서 차이점만 부각됐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점,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 의지를 모두 존중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둘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후대 학자들은 두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은총과 자유의 개념이 서로 다르게 규정되었을 뿐, 서로 다른 차원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성경이 담고 있는 모든 진리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나의 성경을 근거로 제기된 상반된 주장들 중에 어떤 것이 옳은지는 종종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역사적 · 신학적인 성찰을 거쳐 분명해진다.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성경의 일부 구절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44)는 말씀처럼 한 이론을 좇아 발생하는 실천적인 결과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고 있는 성경이 담고 있는 참뜻을 깨닫는 일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1코린 13,12)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우리의 과제이다.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2월호(통권 477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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