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그리스도교 문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
게르만족에게 전해진 그리스도교 거대한 제국이 몰락하면 그 제국의 국교 역시 몰락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짧은 기간 서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멸망 이후에 오히려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갈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후 이 지역 점령자로 등장한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게르만족 용병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제국 게르만족의 개종 과정은 무수한 부족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했다. 본래 로마인들은 북유럽에서 만났던 게르만족을 ‘바바리안(barbarian)’, 즉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갈리아 전체를 평정했던 카이사르마저 용맹하나 길들이긴 어려운 게르만족을 점령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로마제국 후기에 동방 훈족의 위협을 받은 게르만족이 피신해 오자, 로마제국은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로마 시민은 증가하고 사치는 만연한데 정작 수탈할 새로운 점령지는 고갈되자 로마의 재정 상황은 나날이 피폐해졌고, 로마제국은 파산 상태가 되어 용병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410년, 용병으로 일하던 게르만족은 돈도 못 받고 굶어 죽을 위기에까지 처하자 불만이 극도에 달해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점령했고, 쇠약해진 서로마제국은 결국 47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게르만족의 다양한 그리스도교화 과정 게르만족의 일부(서고트족, 동고트족 등)는 이미 흑해 연안에 정주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또한 훈족의 침입을 피해 로마제국에 들어와 살면서, 당시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각 부족의 지도자들은 로마제국 내에서 용병대장을 거쳐 군사령관 등으로 신분이 상승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들이 개종하면서 부족 전체가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를 믿었지만, 호전적인 성격이 강했던 게르만족의 전사들이 완전히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아리우스파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부족은 정통 가톨릭 신앙보다 자신들에게 친숙한 아리우스파를 신봉했고, 일부 부족국가에서는 가톨릭 신앙을 이단으로 몰아 혹독한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그리스도교를 접했던 게르만족 용병이나 그의 부족들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경계 밖에 있던 게르만족(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등)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데에는 특별한 선교 과정이 필요했다. 6세기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롬바르드족의 대부분은 이교도였으며, 왕을 포함한 소수만이 매우 늦게, 그것도 아리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교도였던 프랑크족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점령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인이었던 게르만 부족들은 스페인 등 남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때 로마제국에 점령되었던 브리타니아(현재 잉글랜드 지역)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져 새로운 선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선교에 혁혁한 공헌을 세운 사람이 바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이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96년에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네딕도회 수도자 40명을 브리타니아로 파견했다. 그들은 그곳에 살던 켈트족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6세기 말부터 영국 내에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설립되었다. 종교심이 강했던 켈트족 수도사들은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수도승들과 함께 아직 이교도로 남아 있던 프랑크족에게 성경 말씀을 전했다. 8세기경, 브리타니아 출신의 성 보니파시오와 그의 동료 수도승들이 현재의 독일 지역을 선교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토착화된 성경 게르만족이 유럽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라틴어는 죽은 언어(死語)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불가타’와 같은 예로니모 성인의 뛰어난 성경 번역도 일반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에 담긴 정확한 내용과 세세한 표현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기 나름대로 성경의 중요성을 수용하고 인정했다. 게르만족은 철학이나 수학같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던 민족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던 ‘실체’, ‘본성’, ‘위격’ 등의 추상 용어로는 선교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금은세공과 태피스트리 등 수공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게르만족은 자신들도 가장 중요한 책으로 인정한 성경을 금박과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했다. 오늘날 대미사 때 부제나 사제가 황금색 바탕에 각종 아름다운 돌과 보석으로 장식된 복음서를 들고 행렬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는 금은세공이 발달했던 게르만족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성경 장식에서도 드러나듯 이제 서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사회 전체의 가장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게르만족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따라 사고하며 이를 삶 속에 깊숙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에 그리스 로마 문화와 만나면서 성경의 주요 가르침이 추상적인 철학 개념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표현되었다면, 이제 문맹률 90%가 넘는 게르만족을 위해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으로 다시 한 번 토착화될 필요가 있었다.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녔고 비그리스도인의 문화를 깊이 이해했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현대인들에게도 의미심장한 선교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기존 그리스도교의 온갖 관습을 강요하지 말고, 수용자의 관습 안에서 연결점을 찾아 그것을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승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기쁨을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면, 참된 내적 기쁨이 무엇인지도 더 쉽게 알아듣도록 이끌어 주는 셈이 될 것입니다. 거친 사람들을 단번에 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릇 산에 오를 때에는 단숨에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발 한발 천천히 오르는 것입니다”(〈서간집〉 11,56). * 박승찬 님은 서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 분야는 중세철학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박승찬 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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