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생명수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에서 최고점은 생명수와 관련된 22,1-5입니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환시는 외부에서 내부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생명수에 관한 환시는 새 도성의 중심부에 대한 표현으로 의미상 가장 중요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22,1ㄴ-2ㄱ). 생명수 생명수는 거룩한 도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냅니다. 말 자체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느님과 어린양에서 나오는 생명은 이 도성을 감싸고 있습니다. ‘도성’이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도성을 흐르고 있는 ‘생명수’는 ‘신앙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원동력’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은 이제 신앙인들을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또한 이 생명수가 흐르는 강의 양옆에는 생명 나무가 있어 매달 열매를 냅니다(2,7 참조). 이렇게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 역시 생명수가 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새 예루살렘을 세상 창조 때의 낙원과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새 도성에서 신앙인들은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22,4). 구원된 이들은 더는 구약시대의 전통적인 생각대로 하느님을 마주하지 못하거나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의 이름이 모든 이에게 명시적으로 알려질 것입니다(3,12 참조).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맺음말 맺음말 부분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입니다. 여기서는 새로운 내용을 전한다기보다 지금까지 보여 준 계시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미 새로운 창조와 새 예루살렘의 환시를 통해 일곱 교회에 보낸 약속들은 모두 성취된 것으로 표현됩니다. 에페소 신자들에게 주어진 생명 나무에 대한 약속은 22,2에서,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21,8에서, 페르가몬에 주어진 아무도 모르는 새 이름에 대한 약속은 22,4에서, 티아티라 교회에 약속된 쇠 지팡이로 다스리리라는 것은 천 년 통치에 관한 내용에서, 사르디스 교회에 보낸 생명의 책에서 지우지 않겠다는 약속은 21,27에서, 필라델피아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물게 하겠다는 약속은 새 예루살렘의 환시를 통해, 라오디케이아에 약속한 어좌는 하느님의 어좌가 사람들의 거처 안에 있다는 말씀을 통해(21,3)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맺음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계시의 내용이 참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요한 묵시록은 시작부터 이 내용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1,1). 마지막에도 역시 저자는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하느님에게서 기원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주님, 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22,6). 맺음말은 시작과 비슷합니다.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 실현될 때가 머지않았고 이제 그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지는 마지막 담화는 불의한 이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의로운 이들에게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계속 지켜 갈 것을 권고합니다(22,10-11).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내가 곧 간다”(22,7.12)는 표현과 맞물려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지금 겪고 있는 박해 상황이 길지 않을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제 그때가 다가왔다는 이 두 가지 강조점은 요한 묵시록이 환난 중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가져옵니다. 요한 묵시록에서 악에 대한 심판과 벌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이 더 강조됩니다(22,12).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닌 이들은 이미 보여 준 새 예루살렘의 환시에서 표명되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에 언급된 ‘무엇도 바꿀 수 없다’(22,18-19 참조)는 내용은 구약성경(신명 4,2; 13,1)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를 전하는 전통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지금까지 전한 본문의 내용이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그 안에 담긴 경고와 권고의 말씀들이 축소되거나 조작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묵시록은 1장의 시작과 비슷한 형식으로 자신의 환시를 마칩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은 1,7의 내용을 생각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 부분은 전례에서 사용되던 화답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긴 환시의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 묵시록이지만 그 끝은 신앙인들의 화답으로 마무리됩니다. 또한, 처음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마지막은 편지에서 사용되던 “주 예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으로 끝납니다. 요한 묵시록의 처음과 마지막이 보여 주는 특별한 점은 하느님의 말씀과 계시에 대해 이 내용을 듣고 읽은 신앙인들이 화답한다는 것입니다. * 허규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1999년 수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학하였으며(신학박사),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1월호(통권 488호), 허규 베네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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