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1,6-18) 아침이 밝을 때 새로운 하루에 설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무게로 그 아침마저 밤이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물리적 시간이 흘러도 감정적 시간은 흐름을 멈춘 듯, 때로는 정신을 잃은 듯 어지러이 흘러가기도 한다.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 했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있으면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고, 그렇지 못하면 세상은 악귀들의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논리다. 허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르다. 내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해도, 옆이 시끄러우면 모든 게 산산조각 난다. 내 마음의 평화만 바라고 성당에 다닌다면 아주 부질없는 헛수고다. 성당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는지 먼저 물어 보라. 숙제를 받아 안고 오지 않는다면, 성당은 내 고민의 해우소일 뿐 하느님의 계시 자리가 아니다. 가까운 식구의 부탁도 탐탁지 않을 때가 있는 게 우리네 일상인데,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도 마음이 편하다면 그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빛을 좋아한다. 빛이 하느님이신 예수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긍정적 신호일 수만은 없다. 빛이 왔다는 사실은 하나의 선택을 부추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빛이냐 어둠이냐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선택해서 내가 바뀔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은 내가 ‘되어 가고 싶은 것’에 이끌릴 때가 많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내린 선택이 실은 현재 나의 상태가 드러내고픈 욕망일 경우가 제법 많다. 사람은 혼자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빛은 영원한 타자로 존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빛은 우리가 ‘되어 가는 무엇’이다. 12,36에 “빛의 자녀”라는 말이 있다. 빛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존재의 목적을 되새기게 하기 위해서다. 빛은 욕망의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존재의 이유다. 빛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빛과 더불어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되새기게 한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13). 하느님에게서 난다는 것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모를 일이다. 다만 사람의 욕망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것은 먼저 나의 인간적 욕망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고, 그 욕망을 안다면 그것을 넘어서서 나아가는 길도 알게 될 터이다. 그 길의 시작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는 동시에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출발점일 것이다. 일상에서 ‘나는 무엇이 될까?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이 혼자만의 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믿는다는 것조차 혼자만의 노력으로 환치(換置)하려 한다. 빛이 오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내가 받느냐 마느냐에 몰입한 나머지 빛이 누구이며 빛의 자녀가 되어 간다는 사실을 쉬이 잊어버린다. 빛은 밝히러 왔다. ‘빛의 자녀’를 잉태하러 왔다. 빛의 성격은 ‘다른 존재’에게서 완성되고 추구된다. 그래서 빛은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너와 나, 우리의 사회에서 빛은 그 가치가 있다. 빛이 알려지는 방법 역시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빛은 전해지고 이해된다. 주고받는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빛은 그 가치를 또 다르게 발한다. 증언된 것은 증언한 자와 그 증언을 듣는 자 사이에 일종의 ‘신뢰’를 전제한다. 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팥으로 메주 쑨다는 말에 더 신뢰를 두는 사람은 콩이 메주가 된다는 사실에 둔감해진다. 그래서 진리는 서로에 대해 다가서는 열린 자세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빛은 정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지닌 사람을 찾으러 왔다. 빛이 왔다고 세상에 어둠이 사라져 모두가 정의롭게 정답대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빛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 더욱 많아지고 넓어져야 한다. 그래야 빛이 의미가 있다. 그래야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쉰다. 빛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쫓기만 하면 되는 듯 ‘예수님 사랑, 예수님 믿음, 예수님 전부’라며 자기 인생을 다그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초자연적 현상에 민감한 나머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 일쑤다. 누가 대단한 무엇이 된 사실만 강조하다 보면 대개 비교하는 버릇이 생겨난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나도 가능할까?’ 등의 질문이 쏟아진다. 그러나 누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함께하는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짙게 깔린다. 여기에 너와 내가 만들어 내는 공동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 공동의 자리에 빛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머물다’는 그리스어로 ‘스케네’라고 한다. 이 말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세키나’와 발음이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함께’하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예수님께서 ‘함께’를 보증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를테면 ‘앙상블’의 대명사다. 함께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보다 조심스레 그분을 위해, 그분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이 시급하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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