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4,1-42) 메르스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라가 시끄러울 때마다 국민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 세월호 참사 때는 선박과 구조救助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고, 이번 메르스 사태 때는 감염병에 대한 전문가가 되었다. 전문가여야 할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국민이 전문가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 국민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단절되는 일상을 체험한다. ‘내 아이만 괜찮으면…, 내 건강만 괜찮으면….’ 서로서로를 ‘위험 물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연한 2015년 대한민국의 일상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여느 때와 같이 살고 있었다. 야곱의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일상은 그 여인에게 너무나 당연해서 그 삶이 전부인 양 그렇게 살았을 테다. 예수님의 등장은 이런 일상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내는 데 소용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두 가지 낯선 경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유다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인 자신에게 말을 건넸다는 것, 또 하나는 그 남자가 자신의 옛 삶을 매우 똑똑히 안다는 것이다. 낯선 경험을 한 뒤 그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여 전문가가 된다. 그 경험이 일상을 뚫고 나와 새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라고 부추긴 것이다. 사마리아 지역은 남쪽 유다 지역 사람들에게 더러운 곳이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점령된 후, 이방 민족들이 뒤엉켜 살게 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2열왕 17,24 이하 참조). 그런데도 사마리아 지역 역시 나름대로 전통을 간직하고 살았다. 야곱을 조상으로 섬겼고, 그리짐 산에서 드리는 예배를 남쪽 유다 사람들의 예루살렘과 견주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역사의 단절을 뚫고 길을 재촉하셨다.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는데 굳이 버려진 땅, 소외된 땅, 사마리아를 거쳐 지나가신다. 여인이 당황한 것은 유다와 사마리아의 역사적 단절을 예수님께서 뚫고 나오셨다는 데 있었다. 물을 달라는 예수님께서는 이미 일상 저 너머에 예전에 체험하지 못한 ‘창조적 자리’를 만들어 내셨다. 목말라 다시 길으러 와야 할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얻을 수 있는 자리, 그곳은 ‘하느님의 선물’, 그리고 ‘살아 있는 물’의 자리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로 사마리아 여인을 초대하신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은 성령이었다(7,37-39 참조). 살아 있는 물로서 성령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관계는 ‘살아 있는 물’, 곧 성령을 두고 역전된다. 아직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을 달라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선다. ‘관계의 재정립’이 시작되는 셈이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이 ‘관계의 재정립’은 더욱 명확해진다. 자신의 현상황을 솔직히 고백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식하는 데까지 다다른다. 그 여인의 태도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믿음의 여정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처음 예수님께서 여인을 만나셨을 때 건네신 말씀이 그 답을 찾아가는 셈이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고백하면서 예배의 문제로 이야기를 옮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예배에 대한 관점은 장소와 시간의 두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예배의 때는 ‘바로 지금’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영과 진리’는 예수님 바로 그분을 가리키고, ‘지금의 때’는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도 모르고 그때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25절). 자신 앞에 버젓이 물을 달라고 청한 이가 그리스도이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은 모른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의 답을 듣고야 만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내가 바로 그다!” 우리는 이 단호한 자기 계시적 표현을 모세 앞에 나타난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 들었다(탈출 3,14 참조).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선포가 “내가 바로 그다!”라는 외침 속에 녹아 있다. 참된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지금’이 참된 예배의 때라는 말이다. 이 산이냐, 저 산이냐, 아니면 이 민족이냐, 저 민족이냐, 또 아니면 신자냐, 아니냐의 문제는 포기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예배이고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라면, 이런저런 인간적 방법과 전통이 오히려 예수님에게서 유리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을로 가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29절) 이 말로 여인은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자신이 기다려 온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거의 근접한 셈이다. 나아가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청하여 이틀이나 예수님과 머물렀다. 그 결과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고백한 이들에게 확연히 드러났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세상이 소외시키고 외면한 사마리아인들에게서 확증되고 보증되었다. 단절을 화합과 신뢰로 이어 놓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창조적 자리’에 두 발을 담그는 일상의 긍정적 일탈로 가능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늘 일상의 무덤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나의 일상이 현실의 제도(그것이 종교든 정치든 그 무엇이든)에서 빗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그저 다시 목마른 물일 수밖에 없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나의 우물을, 나의 두레박을 던져 버릴 용기를 가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8월호(통권 473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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