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부전자전(5,19-30) ‘정말로, 진짜로’란 말을 이탈리아어로 하면 ‘체르토(Certo)’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말 중간중간에 ‘체르토’를 양념 치듯 뿌려 댄다. 듣는 이가 대수롭지 않게 듣거나 미심쩍어 하면 ‘체르토’가 가히 폭풍적으로 듣는 이의 귓가를 파고 든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대화할 때는 늘 긴박하거나 쫓기는 듯 힘들었다. 프랑스에서 대화할 때는 또 다르다. ‘내 생각에는…’, ‘내 짐작에는…’이라는 말이 먼저 앞선다. ‘분명하다, 정말이다’라는 말을 좀처럼 쓰지 않아, 듣는 이가 판단하고 믿게끔 여유를 준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멘, 아멘’이란 말을 자주 쓰신다. ‘진실하다, 확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멘’은 오늘 복음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수님이 이 말을 자주 쓰시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된 존재’로 소개하신다(19절 참조). 파견된 이는 파견하신 아버지에게서 보고 듣는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소개할 뿐이다. 예수님 말씀의 진실성과 확고함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아들 예수님의 신앙고백과도 같다. 당신을 드러내거나 당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욕망의 허튼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가 당신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멘, 아멘’으로 끈질기게 강조하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말마디를 불러오고, 아버지는 아들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호칭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리고 의존하기에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호칭은 서로를 깨우치고 서로를 드높인다.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19절 참조). 아들의 낮춤 이전에 아버지의 낮추심 또한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몸소 당신이 움직이시지 않고, 아들을 통해서만 세상에서 일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절제를 보여주시고 아들은 아버지만을 드러내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절제한다. 우리는 이 둘의 절제를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으로 하나 된 내적 친밀성은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사이의 거리를 없애 준다. 서로가 닮아서 하나가 된다(콜로 1,15; 히브 1,3 참조).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원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세상이 함께 나누는데 있다. 아버지는 원래 생명의 원천이셨고(창세 2,7 참조), 그래서 생명을 주는 분이셨다(신명 32,39 참조). 이 생명을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에게도 적용한다(1,4; 2코린 5,17 참조). 예수님이 생명이심은 병든 이를 낫게 하시고(5장), 눈먼 이를 치유하시며(9장),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으로(11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의 신적 속성을 똑같이 누리고 있다는 반증이다(1,4; 5,26; 1요한 5,11 참조). 생명은 심판을 통해 또렷하게 사유되어야 한다. 심판은 분명 선악 구도로 실행되고(5,29 참조), 선한 것을 행하면 보상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예로부터 유효하고 분명했다(욥 34,11; 시편 28,4; 62,13; 잠언 24,12; 마태 16,27; 로마 2,6; 1코린 3,8 참조).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악스러운 것들의 종말에 치우쳐 심판이라는 말마디에 몸서리치며 두려움을 갖는 버릇이 있다. 심판은 그래서 늘 나태한 우리 일상을 조심스럽게 꾸짖는 듯하다. 심판은 아들에게 주어졌다. 아들이 생명을 갖고 있고 생명이신 아버지를 꼭 빼닮았다면, 심판의 이유와 목적은 생명이어야 한다. 생명으로 초대하는 것이 곧 심판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또렷하게 곱씹어야 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24절). 예수님의 입장에서 심판은 당신과 아버지의 존재를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바라는 데 소용된다. 그래서 심판은 생명을 갈구하고 생명을 좇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유물이다. 심판을 목격하고 생명을 생각하자는 게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한목소리다. 목소리에 합당한 자세는 ‘듣는 것’이다.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것으로 생명을 얻어야 한다. 복음은 결국 울려 퍼져 들리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듣는 데는 죽음과 생명의 구분이 필요 없다. 생명의 소리는 산 이와 죽은 이의 구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있는 한, 그분이 말씀하시고 있는 한, 죽음은 생명이고 생명으로 죽음은 재탄생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시간은 시작되었고, 죽음의 시간은 없어졌다. 우리네 인생사의 가장 큰 고통과 그로 인한 절대적 단절은 죽음일 테다. 생명을 알리는 복음이 모든 이, 모든 곳에 닿으려면 죽음이 만들어 놓은 인간의 두 범주가 폐기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 하느님이 죽은 이를 살리신 일에 그 역시 일조하여 완성하시기 위함이다. 태초에 인간은 죽음을 몰랐으나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명은 죽음 앞에 처절히 짓밟혔다. 그런데도 저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뼈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했다(에제 37장 참조). 예수님의 등장으로 생명과 죽음은 ‘힘의 교환’에 따른 이분법적 대립과 오랜 대결 구도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예수님 그분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생명은 하나의 실재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이는 죽어 있어도 산 이처럼 듣게 되니, 살아 있는 것이 죽어 있는 것과 대립할 이유가 없어졌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앞에서는 모두가 하나다. 모두가 부활한 새로운 실재로 서 있다(29절 참조). 인간은 비로소 ‘한’ 범주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한’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람의 아들은 이런 논리를 묘사하는 데 적격이다. 사람의 아들은 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드러낸다(시편 8,5-6 참조). 사람이기에 약하나(히브 4,15 참조),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또한 강하다. 약함과 강함이 사람의 아들의 형상 안에 모순적이게도 얽혀 있다. 또한 사람의 아들은 우리 인간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1,18 참조). 사람의 아들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이 조우하고, 모순과 대립 개념이 사라진다. 흑과 백이, 죽음과 생명이, 그리고 인간과 신이 지금 이 시간, 한자리에서 하나가 되는 건, 오로지 사람의 아들 덕분이다. 부전자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던 하느님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살내음을 풍기신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를 들으실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하고자 하시는 것은 반드시 아버지의 뜻에 닿고야 말았다(30절). 예수님의 인간적 자리에 아버지 하느님은 그렇게 예수님으로 머무르고,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이 세상에서 말씀하신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사제품을 받은 후 2009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11월호(통권 476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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