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보고 듣는다는 것(6,1-15) 요즘 정치가 참 지루하고 피곤하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셈법은 정상적인 공식을 애당초 불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논리, 저 논리 다 끌고 와 진리의 셈법을 붕괴시킨다. 그리곤 늘 ‘국민의 뜻’이라는 정답이 자신에게 있다는 철없는 생트집만 남긴다. 중요한 건, 변치 않는 이념을 붙잡는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다양한 이념의 공존을 슬기롭게 가꾸어 나가는 일이 아닌가. 이념은 판타지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에 길들어 진리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판타지로는 이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념은 제대로 보고자 늘 깨어 있는, 그래서 열려 있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 노력은 대개 낯설고 모호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오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면 더욱 단단해져, 농익은 저마다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거듭나기 마련이다.
어둔 밤,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로 오늘 우리가 읽는 요한 복음의 한 대목이 저마다의 이념을 다시 한 번 고쳐 보는 데 소용되길 나는 바란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반문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지난번 요한 복음서 읽기는 예수님이 ‘홀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6,15 참조)는 말로 끝을 맺었다. 빵을 함께 나누던 예수님이 제자들과 헤어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한다. 빵을 놓고도 세상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가 부딪쳤는데, 상반된 공간상의 움직임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을 더욱 갈라놓는 형국이다. 시간적 배경 역시 갈라짐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오늘 복음의 시간적 배경은 ‘어둠’이다. 어둠을 가리키는 그리스 말 ‘스코티아(σκοτία)’는 ‘빛의 부재’를 의미한다. 요한 복음에서 빛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반해 어둠은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나 거부를 드러내는 표징으로 작용한다(1,5; 3,2; 13,20 참조). 예수님은 어둠 속에 홀로 항해하는 제자들에게 가지 않으셨다(6,17ㄴ). 어둔 밤의 항해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니면 예수님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섣부른 발걸음일 수 있다. 예수님 없는 항해는 혼란스럽다. 큰 바람과 호수의 물결은 제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다. 두려움을 무턱대고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자. 구약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했다(탈출 3,6; 판관 6,22; 이사 6,5; 묵시 1,17 참조). 많은 경우,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것은 침묵과 절제다. 신 앞에 나약한 존재로 서 있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 어떤 말과 행위도 의미없음을 전제하는 일이다. 결국 두려움 앞에 선 인간의 유일한 자세는 침묵과 절제로써 신의 다스림에 오롯이 귀의하는 전적인 의탁이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stadion)쯤 건너갔다는 사실에서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인간적 안간힘을 느낀다. 한 스타디온이 190미터 정도이니 4.7킬로미터 또는 5.7킬로미터 거리는 족히 나아간 것인데, 그만큼 제자들은 예수님과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쓸수록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에는 서툴러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을 만난 듯 놀라는 것 또한 당연하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없다. 적어도 항해의 혼란 속에 예수님은 부재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6,20)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거친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제자들의 노고를 두둔하는 말로 이해하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본 모습을 알리고 있는 중이다. ‘나다’라는 말이 이를 강조한다. ‘나다(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는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신 그 표현이기도 했다(탈출 3,14 참조).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규정하고 있다. 두려움에 갇힌 나머지 진작 알아봤어야 할 당신을 몰라본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님의 일갈一喝이 혼란스러운 밤바다에 울려 퍼진다(시편 107,23-32 참조). 빛이 어둠 속에 왔으되 어둠은 빛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라 외친들, 빛이 빛일 수 있는 건, 어둠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급히 배 위로 초대하지만, 배는 어찌된 일인지 제자들이 가고자 했던 곳에 닿아 버린다. 혹자는 예수님을 만나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했음을 강조하는데,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곳은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였지 예수님이 원했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모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6,60 참조).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적지는 여전히 다르고 멀다.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대개 사람은 보이는 걸 보고 들리는 걸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보고 두렵게 느끼는 건 내 삶의 자리가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운 내 삶의 자리 옆에 예수님은 늘 가까이 계신다. 다만, 우리의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계신다. 함께 가고자 하지만, 일정 부분 거리를 유지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거리감을 인정하는 것은 신앙에 필수적이다.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한다지만 자칫 오해나 욕심으로 인해 그분의 뜻을 곡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다잡는 작업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힘에 달려 있다. 제 욕망을 투사하듯 바라보고 만나는 모든 대상을 다시금 열린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개방성이 예수님을 만나는 필수 요건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은 내 주위의 모든 존재가 내게 호소하는 ‘자기 계시’의 외침과 같다. 들을 귀가 있는 자, 볼 눈을 가진 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것이다. 저만의 이기적 논리를 앞세워 타협이나 조율에 능한(정치, 경제, 문화) 모리배꾼들의 눈과 귀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순수하고 단순한 눈과 귀가 예수님을 만나는 첩경이다. 보고 듣는 것, 너무나 쉬운 것이되, 매번 어렵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2월호(통권 479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