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지금의 여유(6,22-40)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육적인 배고픔을 잊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다는 사실에 우린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곤 한다. 여기에 덧붙여, 예수님은 육과 대립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육적인 바람들’을 애써 없애는 데 우리의 성경 읽기는 집중한다. 나는 이런 의견에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육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살덩이’로 온전히 오신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육적인 바람으로 그분을 찾아나선 걸 그리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라면, 자기 삶이 아프고 고단해서 위로받고 치유되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인가?’다. 내가 진정으로 그분을 메시아로, 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고백한다면 내 누추한 맘속 속된 욕심조차도 쉽게 고백할 터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랑만이 육적인 것보다 낫다는 이원론적 신앙관에 매일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것이 육이든 영이든 간에…. 표징을 표징으로 보는 지혜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온 군중을 영원한 생명을 찾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로 규정한 건 사실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6,26). 이를 직역해 보면 예수님이 군중을 바라본 태도에 흠칫 놀라게 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었고, 그것도 게걸스럽게 먹었기 때문이다.” ‘배불리 먹었다’는 표현인 ‘코르타조(χορτάζω)’는 그리스어로 동물이 게걸스럽게 먹을 때 사용하는 동사다. 예수님은 군중이 ‘빵만’을 보고 자신을 찾는 게 마뜩잖다. 빵이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요한 복음을 읽을 때 늘 아쉬운 것은 표징을 표징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보는 우리의 근시안적 태도다. 묘사된 사건 속에 감추어진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노력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잊어버렸는지 우리는 조금만 깊은 이야기를 할라치면 ‘머리 아프다’며 회피할 때가 잦다. 빵을 빵으로만 보지 않는 태도는 앞선 복음 이야기에서 충분히 깨우쳤다(6,1-22 참조). 예수님은 유한한 빵을 통해 무한한 나눔을 보이셨고, 그것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셨다. 빵의 가치를 돈의 논리로 따지는 우리의 일상적 가치판단은 무한한 나눔의 가치판단과는 결이 다르다. 다른 것을 생각할 ‘사고의 여유’가 표징 너머의 의미를 고민해 보고 찾도록 길을 제시한다. 게걸스럽게 빵을 먹더라도 먹는 것이 무엇인지, 왜 먹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산다는 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 질문해 나가길 예수님은 원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분명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6,39-40 참조). 영원한 생명은 요한 복음이 쓰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말마디다(20,31 참조).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숨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며 늙어 가되 늙지 않으려는 살덩이를 움켜쥔 채 사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6,27 참조). 예수님은 진정한 삶이란 현실에서 영원성을 기억해 내는 일련의 노력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키신다(6,35 참조). 이를테면, 빵을 먹는 지금 이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일상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 사람들은 대개 전통과 과거의 습관에 집착한 나머지 지금 벌어지는 것에 소홀할 때가 잦다. 빵의 이야기에서도 유다 사람들은 탈출 16장의 ‘만나’를 떠올린다. 굶주림의 위협 속에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먹거리는 현실의 삶이 팍팍하면 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달콤한 충격일 테다. 다만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파시즘적 표징으로 작동하고, 행여 다른 관점을 이야기하는 이에게 퍼붓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비판의 핑곗거리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과 군중의 대화가 그러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갈망하는 군중에게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셨고(6,27 참조), 군중은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군중은 예수님에게 표징을 원한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징에는 관심조차 없던 군중이 이제 표징을 원하는 건, ‘예수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라는 질문과 다를 바 없다. 군중은 표징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어도 조상이 먹었던 ‘만나’ 수준의 놀라운 이적 정도는 되어야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일 태세다(6,30-31 참조). 군중이 예수님에게서 바라는 표징은 탈출 16장에서 보는 만나, 딱 거기에 멈춰 있다. 과거의 가치는 과거의 시간적 배경 속에서 의미를 갖되, 새롭게 다가온 현실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덴 더욱 냉철한 분석과 비판의식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서 군중에게 대답하신다. 이 세상에 내려온 하느님의 빵이 바로 자신이라고 군중에게 말씀하신다(6,35 참조). 이 빵은 아버지 하느님이 당신 아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의 ‘계시’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신기한 이적이나 낯선 풍경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 일상을 통해서다. 빵이라는 일상의 필요를 통해 하느님은 당신을 계시하신다. ‘일상’은 ‘만나’처럼 신기할 것도 없다. ‘일상’은 그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믿는다는 게 바로 그러하다. ‘나는 …이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나 부정하지 않은 채 현재 내 앞에 있는 이를 사유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6,35). 예수님은 빵의 표징을 통해 일상의 필요성과 신적 초월성을 하나로 엮어 내는 유일한 하느님의 계시 자체가 된다. 우리는 일상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을 많이 두려워하는 듯하다. 늘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들을 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 막연한 미래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를 회피하게 된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리…, 그래서 미래의 유토피아에 목마른 우리…,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을 제대로 보는 용기 있는 눈이다(6,36.40 참조). 지금을 제대로 보는 것은 영원함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6,40). 이게 하느님의 뜻이고(6,38), 그래서 하느님은 지금, 내 곁에 빵으로 오셨다. 지금이 여유롭지 않으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3월호(통권 480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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