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의심하는 믿음(6,60-71)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 거북한 이유는 자명하다.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들을 마음이 없어서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명확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냥 당신을 ‘먹어 달라’고 하셨고 먹는 이에게 ‘거저 주겠다!’고 하셨다. 애원에 가까울 정도로 줄곧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거북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리라. 워낙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씀이어서 그렇고, 현실적이지 못해서 그렇다. ‘마음’이 동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대개 각자의 ‘몸’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와 직결된다. 수많은 말을 하고 들으며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하루 동안 주고받는 말들을 살펴보면 매일 거기서 거기다. 그 단순한 말들 속에서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가고 흩어지는 요란한 마음은 잠시도 쉴 틈을 허용치 않는다. 산다는 건, 몸의 한계성에 묶여 있느냐, 아니면 그 구속 너머 새로운 삶의 방식에 열려 있느냐의 문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거나 극복하는 모험이다. “영이며 생명”인 예수님의 말씀(6,63)은 실은, 살아 있으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듣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기 때문이다. ‘혐의(嫌疑)’를 품고 예수님께 다가가는 건, 결코 부정적인 자세가 아니다. 어쨌거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니까, 어떻든 예수님과 더불어 논쟁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살아 있음은 낯선 이야기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한다. 듣는 이의 영을 깨워 육의 익숙함을 걷어치우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마음이 거북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가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건 제 몸뚱이의 탐욕이나 욕망만을 좇겠다는 선언이며, 예수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영과 생명을 등지고 제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곳은 육의 익숙함일 테다. 대개 요한 복음이 육을 영과 대비시켜 부정적으로 다룬다고들 말하지만, 요한 복음은 육이 꼭 필요한 것임을 말하기도 한다. 적어도 요한 복음에서 육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할 유일한 자리이자 방법이었으니까(1,11 참조). 육을 통해 생명이 가능한 것이고(3,16 참조), 육이 죽어야 생명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복음의 논리이기 때문이다(마태 16,25; 루카 14,27; 요한 12,25 참조). 요한 복음에서 육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건, 육이 가지는 본디 가치가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 때문이다. 대개 육의 완고함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갖는 제 신념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주는 영광에 물들어 그 영광의 단맛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이들의 비겁함에서 비롯된다(12,42-43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는 건, 어쩌면 제 삶의 자리에서 해방되는 일일 테다. 제 삶으로 되돌아가는, 제 삶의 익숙함을 선호하는, 그리하여 제 삶에 떨어질 이익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결코 제 삶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제자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나 다시 제 삶으로 되돌아갈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리는 답은 그래서 신선하다.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하는 장면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온다(마태 16,16; 마르 8,29; 루카 9,20 참조). 모두 비슷한 듯하지만, 실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대답이 가진 독특함이 있다. 공관복음이 베드로의 답변을 유다 사회가 기대하는 메시아상과 관련하여 그려냈다면(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한 복음은 제자 대부분이 떠나가는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를테면, 세상이 예수를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신앙고백의 주체로 베드로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6,69)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진다. 요한 복음의 목적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데 있음은 자명하다(20,31 참조). 물론 베드로의 고백이 모든 제자의 동일한 고백일 수는 없고, 그 고백이 전적으로 모든 신앙고백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의지적으로’ 뽑았고, 그 중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다(루카 22,22 참조). 예수님과 함께 걷고 그분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건, ‘혐의’를 배제한 순도 100%의 신앙으로만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착각과 편견은 버리자. 신앙고백은 육의 익숙함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육의 본성적 한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심하면서 성장한다. 떠남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다. 떠나거나 따르거나 둘 중 하나라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인 듯 타협인 듯 여전히 헷갈리며 세속 논리와 신앙 논리를 식별하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 때문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일이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화나면 화나는 대로 예수님 옆에 있으면 된다. 멋지고 올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스스로를 옥죄며 예의 바른 이로 하느님 앞에 서 있으려 하는 교만을 벗어던지는 태도가 오히려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믿음은 제 걸음으로 예수님 옆을 따르는 것이지, 예 수님처럼 똑같이 걸어가는 게 아니다. 비틀거리더라도 제 걸음이 삶의 여정을 신앙으로 물들인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과 대중 강연,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목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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