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무모한 이성(12,37-50) 세상의 완고함은 하느님마저 거부한다(12,37). 예전부터 하느님은 인간의 완고함 앞에 속수무책이었다(예레 5,21; 에제 12,2; 신명 29,2-4). 완고함은 신마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한다. 아니 신의 가르침을 내던지고 그의 종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사야는 이런 하느님의 ‘무능’을 가감없이 드러내는데, 이사 53장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통해서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죄가 없음에도 죄인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운명을 피하지 않는다(이사 53,7).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고통받는 것이 야훼 하느님이 인간 세상에서 선택한 태도였다. 세상은 그런 하느님에 대해 차가웠다. 이사야는 이렇게 묘사한다.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 이스라엘의 차디찬 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대목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요한 복음은 유다 사회와 대립한 예수님의 처지와 연결해서 사유한다(12,41).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을 세속의 권력이나 명예에 두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의 영광,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영광이 예수님의 영광이라고 매번 강조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는 속내가 작동한 까닭이다(12,43). 대개 인간의 완고함은 무지나 오해, 또는 신념에 근거하지 않는다. 완고함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른 제 앞날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한다(12,42). 제 이익에 흠이 갈 때, 완고함은 극에 달한다. 1세기 후반의 유다 사회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에 유독 민감했다. 90년경 얌니아라는 곳에 유다의 라삐들이 모여 그리스도인들을 단죄하고 유다 사회로부터 격리시킨 터였다.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고 요한 복음 역시 그러한 두려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냈었다(9,22; 16,22).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12,47). 구원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 요한 복음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생명을 얻는 것이다(12,50). 예수님이 지향한 만남은 유다 사회가 응답한 ‘단절’과는 거리가 있었다. 요한 복음의 첫 번째 부분, 그러니까 표징의 책이라 불리는 첫 번째 부분의 결론에 해당하는 12,44-50은 유다인들의 단절이 하느님과의 단절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영광의 책’이라 불리는 13장부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그려 낸다. 요한 복음은 ‘표징의 책’에서 믿음을 줄기차게 강조해 왔다.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삶의 전이를 가리켰고, 그것은 하느님을 향함으로써 그분을 만나는 길이었다. 그 길은 인간이 찾아 나선 게 아니었다. 이미 마련된 길이었고, 이미 주어졌으나 인간들이 깨닫지 못한 길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 그 길을 이미 준비했다. 살덩이로 인간 세상에 먼저 오셨고, 빵으로 먹히기 위해 그리도 자세히 가르치고 설득했던 예수님이 준비했다(6장). 살덩이든, 빵이든 먹으라고 내놓는 건,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믿는 건 단순한 행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의탁이 믿음의 전제 조건이다. 신앙을 이야기할 때, 억지스럽게 강조되는게 이성의 작용이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해야 맹신하지 않는다는 다소 합리적인 자세는, 무턱대고 믿는다는 다소 어눌하고 서툰 믿음의 행위를 싸잡아 비난하곤 한다. 허나 찬찬히 요한 복음의 예수님을 되짚어 보자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조차 거북해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60) 예수님의 몸을 직접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의 존재를 간파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간의 무모함과 맹신이라 비난받는 대책 없음이 적절히 뒤섞인 게 아닐까. 이성은 신앙과 대비된 채 조력자로서 자리매김할 경우가 많다. 이성을 마치 참된 신앙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이성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을 비이성적이라 비난하는 것이, 이성적인지 되돌아 볼 일이다. 유다인들의 불신이야 당연히 요한 복음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예수님은 그런 유다인들, 나아가 어둠의 상징인 세상마저 사랑으로 껴안는 것으로 요한 복음이 마무리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21,19). 요한 복음은 두 갈래로 찢어진 세상, 즉 선한 이와 악한 이를 갈라놓고 빛으로 어둠을 단죄하며 불신을 신앙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세상의 완고함에 반기를 든 복음이다. 요한 복음의 이성은 이런 이원론적 사고의 틀을 제거하는 데 소용되어야 한다. 유다인들이 완고한 건 그들의 계산이 이원론적이었다는 데 있다. 세상의 영광을 좇으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저 천상의 하느님을 영원히 천상에 유폐시킨 채 지상에 온 하느님은 거부함으로써 두 개의 세상을 견지한 까닭이다. 유다인들 역시 하느님을 믿었고, 따랐고, 그분의 뜻을 살았다. 요한 복음이 쓰였을 무렵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었고 따랐으며 그의 뜻을 지켜 내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왜 반목했을까. 여기에 신앙을 위한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제 입장을 두둔하거나 제 신앙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이성이 작동되어선 안 된다. 그런 이성은 제 편이 아닌 것을 적으로 돌려놓고 비난하는 데 소용되고, 그 끝은 예수님이 죽으면서까지 원했던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요한 복음의 이성은 유다인들의 불신에 대한 비난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대한 촉구가 아닌, 불신에서 신앙으로의 여정을 어떻게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와 고민을 담아내야 한다. 하여, 요한 복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앙을 위해 이성을 제안한다. 다시 고쳐 말하자면 이렇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따져보고 만져 보고 확인해야 하는 이성과는 다른 이성, 그러니까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요한 복음의 이성이어야 한다. 그렇다. 요한 복음이 말하는 이성은, 제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능력, 제 가치관을 한층 합리적으로 세련되게 가꾸는 능력, 알아듣지 못하는 이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언변과 지혜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이다. 아버지가 명령하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설파할 수 있는 용기는 비워 내고 내려놓고 죽음에까지 내달리는 무모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12,50).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유다인들과 분리하는 태도, 예수님 곁에 있으면 저절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편협한 태도는 이롭지 않다. 요한 복음의 두 번째 부분, 영광의 책으로 옮겨 가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을 다시 한번 새겨봄직하다. 무엇하나 따지지 않고, 무엇하나 대들지 않고 묵묵히 침묵 속에 온전히 내맡기는 결기, 그게 신앙이고 이성이다. 믿는다면서 기껏 현실에 기대어, 지식에 기대어 제 앞날을 걱정하며 적당히 품위 있는 신앙을 챙겨 가는 우리의 비겁함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무모한 결기 앞에 어떤 변명을 내어놓을지 반성할 일이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에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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