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예수님의 고별사 I(13,31-14,31) 요한 복음에는 공관복음에 없는 두 개의 고별사가 있다(13,31-16,33). 고별사에 이어 하느님과 ‘하나 됨’을 바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뒤를 따른다(17장). 고별사와 예수님의 기도는 앞으로 펼쳐질 십자가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드러낸다. 요한 복음은 십자가가 단순히 희생과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사실(13,31-32), 사랑의 완전한 실천이라는 사실(13,34-35), 그리고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13,36-38)을 강조한다. 또한, 요한 복음이 서술하는 십자가는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모든 신앙인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되는 자리다. 예수님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현실과 유리된 하느님을 전하지 않는다. 자신을 통해 이미 드러났고 선포된, 그래서 우리 인간과 동고동락하는 하느님을 전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자 남긴 친교와 일치의 자리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자리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그 현존 안에 세상 어떤 것도 흉내 내지 못하는 궁극의 사랑이 살아 숨 쉰다. 그럼에도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달랐다(14,1). ‘하나됨’의 사건인 십자가는 얼마간의 이별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실의 사건이기도 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고별사에서 ‘떠남’을 이야기한다(14,1-3). 예수님이 떠난다는 것은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요한 복음이 쓰인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당혹스러운 문제였다.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부재를 살아갔고, 그의 독자들 역시 예수님의 빈자리를 느끼는 데 익숙했으며, 익숙한 나머지 예수님이 살았던 지상 삶의 추억은 멀어져만 갔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을 떠난 예수님이 실은 떠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육체의 부재가 존재 자체의 부재가 아님을 강변하고 싶었다. 하여 예수님은 신앙인들 사이에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했다. 말하자면 이렇다. 예수님은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의 떠남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준비의 여정이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기 위해 예수님은 떠난다(14,3). 예수님의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 ‘떠남’으로써 ‘기다림’이라는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떠나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신앙인들은 그분의 부재를 슬퍼할 게 아니라 그분의 삶을 더듬고 그분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제 삶이 지향해야 할 궁극의 가치에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아로새겨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으로 요약된다(14,6). 예수님의 삶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과도기적 가치로 재단해선 안 된다. ‘길’로서의 예수님은 하느님 현존을 향한 출발점인 동시에 그 현존을 이미 맛볼 수 있는 도착점이다(신명 5,32-33; 시편 27,11; 이사 35,8).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미 만나 뵌 자리이기도 하다(1,14; 4,23-24; 8,32).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사실은 생명이신 하느님의 현존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시편 16,11; 잠언 6,23; 10,17). 요컨대 예수님을 봤으면 하느님을 뵌 것이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기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이미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을 보여 줬고 세상이 하느님을 눈과 귀로, 가슴과 머리로 보고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직접 인간의 살덩이를 취했다(1,14). 이 세상이 당신의 본디 고향이 아님에도 온전히 제 삶의 자리로 여겼고 이 세상의 가장 비루한 곳에 비집고 들어와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서 살았다. 이 세상이 천상이 아님에도 천상의 영광을 이 세상의 가장 비참한 자리, 곧 십자가에서 확연히 드러낸 분이 예수님이다. 어둠이 싫어서 피한 곳에 빛이 있는 게 아니라 빛이 어둠 속에 있음으로써 어둠과 빛의 대립을 허망하게 만든 분이 예수님이기도 했다. 처음인 듯 마지막을 살고, 내일의 설렘으로 지금을 기뻐하고, 저곳을 향하되 지금의 자리를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지향하는 아버지 집에로의 여정이고 완성이며 그런 예수님을 보는 것이 이미 아버지를 보는 것이었다(14,7). 필립보는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14,8). 예수님을 보면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그의 몰이해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신앙인이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예수님이 없으니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며 자신을 채근하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지금의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며 좀 더 나은 내일의 멋진 신앙인을 꿈꾸는 우리의 모습이 필립보의 몰이해와 많이 닮아 있다. ‘내일’만을 꿈꾸는 신앙인의 태도는 ‘지금, 여기’에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전제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런 몰이해를 극복하게 도와주는 존재이다. 요한 복음의 성령은 ‘보호자’다. ‘보호자’로 번역된 그리스말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도와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신비한 은사나 능력을 선물로 주시는 분으로 성령을 이해하는 사도 바오로와는 달리 요한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친 바를 다시 깨우치게 하는 ‘교사’로서 성령을 규정한다(14,25-26). 예수님의 부재를 기다림의 희망으로 바꿔 놓는 데 성령의 역할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이 지상 삶을 통해 가르쳤던 사랑의 삶을 기억하게 하고, 예수님의 부재를 사랑의 실천으로 메울 수 있도록 신앙인들을 가르치는 게 성령의 역할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가르치며 여전히 육화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부활 후 다시 발현할 예수님에 대해 요한 복음은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 준다. 다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데 조건이 있다. 사랑이다(14,23-24). 예수님이 다시 돌아올 세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되, 사랑해야만 함께 머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실은 무섭고 떨리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맞서 평화를 유지해야 하고 세상을 거슬러 죽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두고 하느님과의 내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영성적 혹은 정신적 평화라고 이해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영성적이든 정신적이든 평화를 살아 내야 하는 이는 현실적 고통과 어려움을 어떻게든 감내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을 벗어난 순수 정신적 차원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했듯, 우리 신앙인들 역시 현실의 고통과 환난, 그리고 인내 속에 사랑을 살고 전하며 깨우쳐야 한다. “일어나 가자”는 말씀으로 첫 번째 고별사는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연결이 자연스러우려면 그다음의 이야기는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는 이야기(18,1)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요한 복음은 첫 번째 고별사 다음 15장부터 두 번째 고별사를 굳이 등장시킨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많다. 십자가 죽음 전에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과 사랑에 흠뻑 젖어야만 한다. 사랑의 표징이고 일치의 상징인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지 않도록,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더 배우고, 더 깨달아야만 한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5월호(통권 494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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