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발견(20,1-31) 일상을 산다는 건 때론 견디기 힘든 무미건조함을 참아 내는 것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새로운 것 하나라도 움켜쥐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애잔하기까지 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이들에겐 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들의 여유가 때론 부럽고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그게 우리 서민들의 삶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무엇을 찾는 것, 나는 그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몸뚱아리가 어떻게 변할지, 그 몸뚱아리가 하느님과 어떻게 함께할지에 대한 질문은 요한 복음서, 나아가 다른 복음서들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발견이다. 인간이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그려진다. ‘빈 무덤’ 이야기는 그 새로운 발견의 작업장이다. 주간 첫날, 새로운 날이다. 어제의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이다. 처음은 새롭고 설렐 수 있지만, 빈 무덤은 누군가에겐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찾고 있는 건, 예수라는 익숙한 사람,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20,1) 예수님을 찾았다. 이른 아침이나 아직 어둠이 있는 시간이다. 빛으로 오신 하느님을 아직 어둠 속에서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통해 어둠을 걷어 내고 빛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발견할 것이다(20,16-18). 새로운 발견은 일상에서 낯선 것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여행이다. 이 여행은 제 지식의 범주와 제 신념의 더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우리는 요한 복음 전체에 걸쳐 강조되어 온 ‘믿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카나의 혼인 잔치부터 시작한 ‘믿음에의 요청’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맞닿아 있다. 이 세상에 육화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 그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죽어 간다는 것, 그리고 죽었지만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이 이미 인간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요한 복음의 ‘믿음’이다. 다만 그 믿음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누군가가 알려 주고 깨우쳐 주는 지식의 축적이나 수련의 땀방울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믿음의 진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부활한 예수님의 개인적 관계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 마리아는 부활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천사의 등장과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는 서서히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요한 복음의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마르 16,6-7 참조). 천사들의 질문은 “여인아, 왜 우느냐?”(20,13)이다. 마리아의 울음은 죽음의 자리에 묶여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한 상실감에 젖어 있다. 천사들의 질문은 그 상실감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20,15). 울음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유 없음’으로 끝이 나야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신의 자리에 천사들이 앉아 있었고, 예수님은 지금 부활한 몸으로 마리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울 이유가 없었다. 잘 알다시피 천사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존재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 시신의 사라짐에 얽매인 마리아의 울음은 이런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는 행동이 되어 버린다. 마리아가 눈앞의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제 지식과 신념에 묶인 채 대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건, 인식의 굴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마리아는 그 굴절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마리아의 해방은 예수님이 마리아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개인적으로’ 부른다. “마리아야!”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라뿌니”, 곧 ‘나의 스승님’이란 뜻이다(20,16). 이 호칭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 의문을 부추긴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20,17). 마리아는 지상의 예수님, 자신에게 선생이었던 예수님을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다. 그 만남에서 마리아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 하여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다. 만남 이후 마리아는 복음의 전도사가 된다. 제자들에게 뛰어간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20,18). ‘주님’은 통상 부활한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초대 교회가 사용한 호칭이기도 하거니와 초대 교회 신앙인들의 정체성을 담아낸 호칭이기도 했다. 마리아에게 건넨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자.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20,17).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차원의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먼저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며, 그다음으로 그 하느님이 육화한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가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느님은 우리와 같은 형제가 된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온전히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주님’이라는 호칭 속에 녹아 있다. 마리아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나, 그 믿음 안에 이미 하느님은 인간과 하나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부족한 믿음 안에 계시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제거된 믿음의 자리나 신앙의 본보기가 될 인물들이 아닌, 두려워 숨어든 비루하고 비겁한 제자들 가운데 등장한다(20,19). 예수님의 발현으로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하고, 그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이어진다. 문을 걸고 있었던 폐쇄적 태도는 세상을 향한 개방적 태도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죽음의 반대가 부활이 아니고, 세상의 반대가 교회가 아니며, 악의 적대적 대립이 선이 아니다. 예수님의 발현은 세상의 이원론적 대립을 무너뜨린다. 부활은 죽음 안에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악은 선을 향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당신의 발현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따지고 편을 나누는 세상에서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태초에 하느님의 숨을 받아 모든 것 안에서 조화를 지향하고 조화를 관리하며 살아갔던 인간의 본디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창세 2,7 참조). 토마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통합적 사고’를 더더욱 견고케 한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첫 발현을 보지 못했으나 두 번째 발현에서 ‘믿는 자’로 거듭난다. 첫 번째 발현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토마스를 두고 불신의 대명사로 이해하는 건 곤란하다. 다른 제자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믿음이 토마스의 입을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믿음은 죽음의 흔적,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통해서였다.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는 걸 두고, 토마스의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탓할 이유도 없다. 믿음은 본디 그러하다. 약하고 부족하고 휘청거리더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끈기가 믿음이다. 요한 복음이 쓰인 시대의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재림은 더디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없다며 힐난할 때, 요한 복음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보기는커녕 만지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육의 예수님이 아닌 믿음의 예수님이 진정 필요할 때,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0월호(통권 499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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