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서 해설] 사랑(21,1-25) 요한 복음의 마지막 장이다. 대개 요한 21장은 후대에 덧붙여진 부분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21장은 요한 복음 전체, 나아가 요한계 문헌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사랑’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요약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것인가? 요한 복음은 참으로 아픈 사랑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그려 낸 복음이 아닐까 한다. 어둠과 불의, 그리고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외아들을 보내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어떻게든 세상을 껴안으려는 하느님의 절규와 몸부림이 가득한 복음, 그것이 요한 복음이 아닐까. 예수님은 늘 세상과 하나였고, 일상의 평범함 속에 비범한 하느님을 증거했다. 외딴 곳, 신비스러운 곳, 낯선 곳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냈다. 요한 21장은 다시 한번 일상 속 하느님 사랑을 먹는 이야기를 통해 전개된다.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기적의 서술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사실, 요한 복음은 기적이나 이적이란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징 너머의 의미를 찾도록 독자들을 초대한다. 고기를 많이 잡는 데 시선을 두지 말고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사건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요한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의 표징적 사건을 보았다. 예수님은 함께한 사람들을 먹이고 그들의 영육을 채웠다. 이른바 ‘나눔의 풍성함’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계속된다. 한번 세상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 일상의 풍요로움을 위해 함께하신다. 다만, 일상에서의 하느님은 쉽게 발견되나(21,1.14), 쉽게 알아보기 힘든 존재다.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가 그분을 가리켜 ‘주님’(21,7)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호숫가를 지나가는 라삐 정도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베드로가 물속으로 뛰어든 것은 제 부족한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한 부끄러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건, 요한 복음이 줄곧 강조해 온 믿음의 사람이 갖는 특권이다. 요한 복음은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흔적을 더듬는 유일한 방법으로 ‘믿음’을 제시한다. 믿음은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소극적 도박이 아니다. 베드로는 낯선 남자의 제안을 따랐다.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한 어부가 다른 데 그물을 쳐보라는 낯선 이의 말을 순순히 따른다는 건, 제 인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해방과 자유를 이뤄 내는 용기 있는 일이다. 믿음은 제 삶의 완전함을 위해 수련과 완덕의 삶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수련과 완덕은 어찌 보면 제 삶과 그 가치에 더욱 몰입하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타인과 주변에 무감각해지게 하는 위험도 내포한다. 요한 복음의 믿음은 자기로부터 해방하여 일상 속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있다. 함께 먹고 마시는 식구라도 서로를 알지 못해 반목하는 경험은 숱하지 않나. 대개 사람은 보는 것, 듣는 것을 보고 듣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을 보고 듣는다. 예수님의 역사적 존재가 사라진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기존의 제 삶에 대한 안온함이 아니라, 제 삶에서부터 해방되어 새롭게 태어나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있었다. 아침을 먹는 일상은 반복되고 반복된 만큼 지루할 수 있으나,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아침은 ‘주님’을 깨달은 기쁨과 풍성함의 시간이 된다. 반복된 일상에 묻혀 살더라도 자신으로부터 진정 해방되어 예수님과 함께 사는지, 아니면 그 일상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며 예수님을 철저히 소외시키는지 요한 복음의 저자는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고쳐 보자면 이렇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일과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일상의 수많은 사건과 상황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우리 삶의 자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 요한 복음이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다. 아침식사 후 본격적으로 사랑 이야기가 진행된다.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묻는 사랑은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의 모난 부분을 상쇄한다.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맡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보자. 그분이 바라는 건, 오로지 당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본디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 친교라고 해도 좋고, 연대라고 해도 좋다. 양들을 위임받은 베드로 역시 예수님에 대한 사랑 고백 위에 이른바 ‘목자’가 될 수 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기반 위에 서로가 형제가 되는 데 있다. 세상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인간을 상하관계의 틀로 대하고 규정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도 벗으로, 인간과 인간도 형제적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15,14 참조).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박해를 비껴갈 수 없다. 베드로가 양을 치는 건, 베드로가 순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21,18 참조). 1세기 말엽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겪은 현실적 박해는 어떤 의미로 참된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표징과 같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이고, 주님은 그 길로 신앙인을 늘 초대하고 있으며(21,19 참조), 그 초대는 결국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고통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광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너무나 사랑하는 예수님이 걸어간 길을 애써 찾는 이가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사랑의 길은 홀로 걸을 수 있는 용기 있는 길이다. 많은 신앙인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교는 대부분 자기비하로 연결된다. ‘저 사람처럼 신앙심이 깊으면 좋을 텐데’, ‘매번 기도해도 신앙심이 커지기는커녕 무미건조한 마음만 스산히 남아.’ 이렇게 자책하는 신앙인을 많이 본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을 다시금 되짚어 보자.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1,22).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비교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호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예수님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사유를 기본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신앙심이 더 깊어지거나, 신앙의 모범적 모습에 맞갖게 살고자 하는 태도는 실은 각자도생하겠다는 제 욕심이지 하느님께 나아가겠다는 신앙이 아니다. 이미 오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또다시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다. 요한 복음은 그 해방의 기록을 담고 있다. 숱한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앎과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버젓이 일상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증언하고 기록한 것이 요한 복음이다. 빛이 어둠에 왔으나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오로지 인간의 완고함 때문이다. 신앙을 언급하기 전에, 예수님을 언급하기 전에, 제 삶이 열려 있는지 닫혀 있는지 먼저 묻는 게 요한 복음을 읽는 이의 일관된 자세여야 한다. 태초부터 말씀은 계셨고, 종말까지 말씀은 계실 테다. 일관되게 인간 세상에 사랑으로 다가서시는 하느님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듣고 듣고 또 듣는 일뿐이다. 들을 귀도 없으면서 늘 들었다고 되뇌는 우리의 완고함이 예수님을 가로막고, 예수님을 죽이고, 예수님을 묻어 버린다. 예수님을 살리는 길은, 또다시 사랑이다. 사랑하면 열리고 사랑하면 듣는다. 그게 전부다. * 박병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2001년 서품된 후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성서신학). 현재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담당으로 성서 사목 중이며, 대중 강연 · 방송 진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박병규 요한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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