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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서 해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6,13)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8,263 추천수0

[이사야서 해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6,13)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겨우내 화분을 들여 두었습니다. 난방까지 하니 온실이 따로 없습니다. 화초는 잘 자라다 못해 비실비실해졌습니다. 힘이 없이 가늘고 길어지더니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잎은 더 약해졌습니다. 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은 길은 하나입니다. 뿌리만 남기고 깨끗이 잘라내고, 봄바람을 맞으며 튼실하게 새로 자라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사야를 불러 파견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뜻하신 계획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느님을 뵙고 예언자로 파견되는 장면을 전합니다.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6,1), 기원전 740년 무렵입니다. ‘요탐이 임금이 되던 해’가 아니라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라고 표현한 것이, 의미가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때 이사야가 본 것이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임금이라는 뜻이지요. 하늘 높이 임금으로 앉아 계신 주님과 죽어서 왕좌를 떠나는 인간 임금들이 대비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로 활동한 40년 동안 여러 임금을 만나지만, 그들은 모두 덧없이 죽어갑니다. 거룩하신 하느님만이 영원한 통치권을 쥐고 계십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6,3) 이사야서의 하느님을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은 이사야서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호칭은 이사야 예언서 제1부만이 아니라 제2부와 제3부에서도 계속 사용되어 후대의 편집자들이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와 같은 신학을 이어갔음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이외의 다른 책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알려져 있듯이 히브리어에서 ‘거룩하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따로 떼어 놓다’라는 어근에서 유래하지요.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그분의 절대성,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하느님, 그분의 영역에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하느님을 뵈었던 이사야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6,5)라고 말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6,8) 하고 용감하게 대답했던 이사야의 소명 사화에서는 다른 예언자들의 경우와 달리 ‘이의 제기’라는 요소가 매우 약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망했다”는 이사야의 말을 일종의 ‘이의 제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을 아이라고 말했던 예레미야(예레 1,6)와 마찬가지로, 부르시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당함을 고백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성(聖)과 속(俗)의 분리입니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하느님을 뵈었으니 이제 망했다는 말은, 속된 세상에 속한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느끼는 이사야를 합당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명을 맡기고자 인간을 부르실 때, 스스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예언자들의 ‘이의 제기’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고 말씀하시지요. 부르심 받은 이들이 약했기에 그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활동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은총도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소명과 사명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 보낼 사람을 찾으시는 것을 본 이사야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6,8) 하고 나섭니다. 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응답합니다. 하느님께 정말 넓은 마음을 보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부탁을 하려고 전화를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한번 얘기는 해 보세요”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부탁할 것인지 보고 대답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도 흔히 그렇게 합니다. 무엇을 요구하실 것인지 먼저 밝혀 주시면, 그 조건을 보고 응답할지 여부를 결정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무엇을 명하시든 하느님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말씀드립니다. 파견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이상합니다. 백성은 듣고 또 듣되 깨닫지는 말아야 하고, 보고 또 보되 깨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아예 그 백성이 마음과 귀와 눈을 닫게 해야 합니다.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6,10).

 

무슨 일을 시키실 것인지도 모르고 나섰더니,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하라고 이르십니다. 회개를 설교하여 백성이 마음을 돌이키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해야 하지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제키엘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을 보내시면서, 백성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언자가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이사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백성이 귀를 기울일 것이라서, 회개할 것이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이 선포이기에 선포할 따름입니다. ‘듣든 듣지 않든’ 그것은 예언자의 몫이 아닙니다.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시작을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온 땅이 황폐해질 때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그곳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여도 그들마저 다시 뜯어 먹히리라”(6,13). 백성이 모두 쫓겨 가고, 그나마 남아 있던 십분의 일마저 다시 뜯어 먹힐 때까지 가야 합니다. 그때가 되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예언자들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멸망을 겪은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됩니다. 철저한 실패를 겪고 나서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멸망할 때까지 마냥 손을 놓고 기다리시지 않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남 왕국 유다에서는 이사야와 미카, 그리고 예레미야 등의 예언자들이 모두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멸망하고 나서야 그 백성은, 예언자들이 실패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사명이 하느님의 계획에 들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신비롭습니다. 멸망이 끝은 아닙니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6,13). 그루터기만 남으려면 나무가 모두 베어져야 합니다.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것처럼, 그 밑동만 남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 밑동에서부터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멸망을 통한 구원. 이것이 예언자들의 역사에서 알아볼 수 있는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 많은 경고에도 멸망을 피하지 못했음을 알게 될 때, 이스라엘은 구원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자신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기에 부당함을 알았기에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으로 예언자 소명을 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무능을 진심으로 깨닫고 난 후에 하느님의 능력과 그분의 은총에 의지하여 새 역사를 열어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그루터기만 남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을 때 하느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앗이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6년 5월호(통권 482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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