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해설] “임마누엘”(7,14) 조선 시대에 임금이 어느 날 갑자기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면,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임금이 병에 걸렸거나, 반란의 조짐이 있었거나, 어떤 식으로든 왕권이 흔들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 책봉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조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표징을 청하여라”(7,11) 시리아-에프라임 전쟁 때에, 유다에 쳐들어온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는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7,6)라고 했습니다. 유다 임금 아하즈는 왕위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종묘사직이 아니, 다윗 왕조가 불안합니다. 이때 임금의 마음은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7,2) 떨렸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이 믿음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 아하즈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에 또 하나의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7,11). 지금 하느님은, 불안해하는 아하즈의 불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아하즈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훌륭한 이유를 대며 표징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한다는(7,13) 이사야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표징을 청하지 않은 것은 훌륭한 믿음의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아무 말씀이 없었는데 그가 표징을 청했다면 그것은 주님을 시험하는 일이 될 수 있었겠지요. 유딧기에서 날짜를 정해 놓고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지 시험하려 하던 배툴리아 주민들에게, 유딧은 그러한 시도가 사람에 지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유딧 8,12 참조). 그러나 아하즈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시려 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하느님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믿음의 시험을 피하려 했습니다. 표징을 보여 주신다면 아하즈는 그 표징에 대해 자신의 믿음을, 또는 불신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애써 숨기고 있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싫었을 테지요. 그러나 그 도전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불신을 보게 하십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7,14) 하느님께서 그에게 보여 주시는 표지가, 아들의 탄생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는 마태오 복음은 잠시 잊어야 합니다. 아하즈의 입장에서 이사야의 선포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표징은 아하즈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칠백 년도 더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리라는 것은 아하즈에게 주어지는 표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는 이 구절을 “동정녀가 잉태하여…”라고 옮기지만 히브리어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꼭 처녀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그저 젊은 여인을 가리킵니다. 더구나 그 단어 앞에 관사가 붙어 있어(“그 젊은 여인”), 이사야와 아하즈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아하즈의 아내라고 생각합니다. 유다교 전통에서는 늘 이 “젊은 여인”이 아하즈의 아내 아비야를 가리키고 태어날 아기는 히즈키야였다고 보아 왔습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가능성 있는 해석입니다. 실망하셨나요? 글쎄요, 아하즈라면, 표징이 칠백 년 후에 주어지리라고 했다면 더 난감했을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다윗 왕조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아하즈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그것은 왕조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약속의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표징이라고 해서 꼭 동정녀 잉태 같은 기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평범하게 보이는 한 아기의 탄생도, 위기 상황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 왕조가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에 아하즈의 아내가 아들을 낳는다면, 아하즈가 조선 시대 임금이라면 그 어린 아기를 바로 세자로 책봉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아기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7,14) 그런데 하느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성가시게 했던 아하즈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표징은(7,13 참조) 구원의 표징이었을까요, 심판의 표징이었을까요? 흔히는 구원의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의 탄생은 분명 기쁜 일이었을 것이고, 더구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위험에 처한 다윗 왕실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말해 줍니다. 그 아기가 “엉긴 젖과 꿀을” 먹게 되리라는 것도 풍요의 약속으로 볼 수 있고, “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7,16)라는 선언 역시 시리아-에프라임 전쟁을 일으킨 두 나라에 대한 심판 선고이니 아하즈에게는 좋은 소식이겠지요. 하지만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말하는 어조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성가시게 한 아하즈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하시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까요? 아기가 태어나리라는 이사야의 선포는 “이걸 봐라!”라는 식의 경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젖과 꿀”이 꼭 좋은 음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합니다. 농사가 잘되면 빵과 포도주를 먹겠지요. “아시리아의 임금을 시켜”(7,17)라는 어구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보아, “에프라임이 유다에서 떨어져 나간 날 이후 겪어 본 적이 없는 날들”이 큰 재앙을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아하즈의 믿음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하즈가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임마누엘의 탄생은 예수님의 상처를 확인하려 했던 토마스 사도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에게 그 믿음을 온전히 끌어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닫고 계속 하느님 아닌 다른 무엇에 의지하려 하고 있었다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표징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를 말에서 떨어지게 하신 것과 같이(사도 9,3-4) 그를 꺾어 놓으시는 하느님 권능의 심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시듯이, 표징은 아하즈의 약한 믿음을 위해서 주어집니다. 다윗 왕조를 지켜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아하즈가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도록, 이 위기의 때에 장차 그의 왕위를 이어갈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마태 1,23)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 주는 표징,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표징임을 알려 줍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젊은 여인”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칠십인역 그리스어 이사야서에는 이미 “동정녀가 잉태하여…”라고 번역되어 있었고, 마태 1,23에서는 그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신약성경 본문에 더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예고한 임마누엘의 탄생이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고 아하즈의 아들을 가리킨다는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이사야서의 한 구절에 몰두하기보다 구약과 신약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서서히 계시하셨습니다. 당신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역사의 여러 사건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에 걸쳐 여러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하느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모습을 남김 없이 보여 주십니다. 아하즈에게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은, 때가 찼을 때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친히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가장 온전한 의미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아하즈에게 주셨던 표징보다 무한히 분명한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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