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해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이사 40,28)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천지를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지가 다른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 질문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운 분들께는 처방약으로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면 이사야서 40장에서는 왜 하느님을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40,28)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느님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는 몇 가지 중요하고 새로운 신학적 주제들이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창조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창조 교리는 주로 창세기와 이사야서에서 다루어지고, 다른 부분들에서는 단편적으로 나타납니다. 많은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아니기에 그만큼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2부의 첫 장인 40장에서부터 이미 창조라는 주제가 되풀이되며 강조됩니다. 이 장에서 하느님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되었고 산과 언덕들을 천칭으로 달았던 분(12절), 하늘을 휘장처럼 펴신 분(22절), 별들을 창조하신 분(26절),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28절)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무슨 의미에서일까요? 지금이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요나는 아주까리가 말라 버리자 하느님께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가 아주까리를 심어 키운 사람이었다면 훨씬 더 안타까워했겠지요. 더 나아가서, 왼쪽과 오른쪽을 가릴 줄 모르는 니네베의 수많은 사람을 만드시고 돌보신 하느님은 그들을 아낄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그분께는 그들 모두가 소중하고,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그들을 잃고 싶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사야서를 읽는 이들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바빌론에 유배를 간 지도 한 세대가 지났습니다. 곧 돌아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버려진 아이처럼, 아무도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40,27). 멀리 유배지에 가 있으니 더욱 외롭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는데, 하느님으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말합니다. 하느님은 저 수많은 별을 만드셨고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고, 그래서 그 모두가 하느님께 소중하다고. 인간이 헤아릴 길 없는 무궁무진한 지혜로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은, 이 먼 땅에 와 있는 너의 발걸음도 헤아리신다고. 그러니 그분을 믿고 힘을 내라고 합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것, 그것은 억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순간마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을 먹거나 말거나, 병이 들거나 말거나, 유배를 가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나에게 눈길을 고정하고 있는 분이 계심을 뜻합니다. 유배 끝무렵의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때 예언자는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40,28)을 말합니다. 유일하신 하느님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유일신 사상과도 연관됩니다. 땅의 일부가 아니라 “땅 끝까지” 오직 그분이 창조하셨다면, 다른 신이 자리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이것 역시 이사야 예언서 제2부의 신학적 특징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에 처음부터 유일신 신앙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른 시기에는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이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이 과연 존재하는지 여부는 생각할 주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다른 민족들은 다른 신들을 섬길지라도 이스라엘은 오직 주님 한 분만을 하느님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특히 신명기에서).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1열왕 18,21)라고 말했던 엘리야는 다른 이들보다 앞서 나간 것으로 나타납니다. 좀 과감하게 말한다면, 많은 경우는 다른 신들이 존재해도 상관이 없었을 듯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섬겼다면 주님은 질투하셨겠지요. 그런데 바빌론 유배를 겪던 시기에, 엄밀한 의미의 유일신 신앙이 확립됩니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44,6)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신들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은 질투의 대상이라기보다 조롱의 대상이 됩니다. 어떤 단락에서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서 일부는 잘라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그 나머지 토막으로 신을 만듭니다(44,15-16). 그러니 그들이 신이라고 하는 것들은 고기 굽는 장작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신들은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안고 다니십니다(46,1-7). 우상이란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 생명 없는 존재이고, 살아 계시며 역사에 개입하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키루스를 부르신 하느님 그렇다면,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바빌론에 유배 온 이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지요.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선포되는 구원은 구체적으로는 키루스를 통해서 실현되고, 이사야서에서는 키루스에 대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메시아), 주님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이라고 말합니다(45,1). 매우 생소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방인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모세나 판관들처럼 당신 백성 가운데에서 그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 사람을 불러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페르시아 사람이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에게 살 길을 열어 줍니다. 만일 여러 신이 있어서 이스라엘에게는 주님이 있고 바빌론은 바빌론대로, 페르시아는 페르시아대로 그들의 신이 따로 있다면, 키루스를 불러 일으킨 이는 아마도 페르시아의 신이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바빌론 사람들은 여러 신이 서로 경쟁하는 속에서 마르둑이 키루스를 불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나보니두스가 마르둑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겼기에, 마르둑이 그를 불러 와 나보니두스를 멸망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키루스의 등장 역시 유일한 하느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선언합니다. “내가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니 그가 왔다. 나는 해 뜨는 곳에서 그를 지명하여 불렀다”(41,25). 키루스가 주님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를 당신 도구로 택하신 분은 그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신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2부에서 창조 신앙과 유일신 신앙은 결국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시작된 때부터 모든 순간에, 그리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모든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배지에서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하느님이 나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에게, 예언자는 이 세상 어느 구석도 그 하느님의 통치를 벗어난 곳은 없다고 말합니다. 나를 만드신 분은 지금도 나를 생각하시고 나를 돌보십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43,1).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 아가》,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등을 썼고, 《약함의 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늘의 지혜》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7년 7월호(통권 496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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