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뼈대 있는 집안 출신 예수님 : 예수님의 족보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내려가곤 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타계한 터라 할머니가 외로울 거라 생각했는데 그 마을에 함께 사는 삼촌과 고모와 사촌과 조카들이 많아서 적적할 틈이 없어 보였다. 마을에 박 씨만 사백여 호 모여 살았는데 고향에 내려가면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도시 아이를 구경하러 곳곳에서 친척이 몰려왔다. 아무튼 그중에서 종손 어르신의 위엄은 실로 대단했다. 그분이 나타나면 모두들 쩔쩔매는 모습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종손 어르신이 자신의 뿌리라곤 도통 모르게 생긴 도시 아이를 계도할 요량으로 족보를 몸소 들고 왔다. 그 근엄한 모습에서 족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곤 족보의 인물들을 소개하는데, 우리 가문에는 영의정을 비롯한 고관대작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의 든든한 뿌리에 자부심을 느낄 즈음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6·25때 참전해 전사한 집안 어른 중 한 분이 육군 대장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랐던 것은 아버지가 어느 회사의 사장으로 떡하니 성함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태 아버지가 당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꼴이다. 스무 살 무렵 곧 진실을 알게 되었다. 6·25 전쟁 당시 우리 군대의 최고 계급은 육군 중장이었고, 아버지는 5·16 쿠데타로 실직을 하고 작은 신문사 주필로 있었기에 온 가족이 사흘 건너 수제비와 열무김치만 먹던 처지였다. 그런데 육군 대장이 웬 말이며 쫓겨난 회사의 사장이 무슨 조화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진실일까? 당시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몇 십 년이 지나 더 ‘어른이 되고 나자’ 족보라는 것에 으레 과장이 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한 한 가문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허풍을 좀 칠 수 있고, 설혹 허풍이 들어 있다 한들 법적 제재도 받지 않으니 육군 대장이 못 나올 리 없었다. 뜬금없이 족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마태오 복음서가 족보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마태오 복음서를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예수님 역시 우리처럼 뿌리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게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예수님 족보에도 과장이 없진 않다. 마태 1,1-17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에 이르는 족보가 나온다. 민족의 조상이자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물론 이사악, 야곱, 보아즈, 이사이, 다윗, 솔로몬, 히즈키야, 즈루빠벨, 엘야킴, 차독, 엘아자르 등 구약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이 모두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이 위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쯤에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족보에 과장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좀 냉정해지기 마련이다. 족보에서 주장하는 화려한 혈통은 예수님과 무관하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탄생했기에(마태 1,18) 화려한 혈통의 아버지 요셉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약점은 같은 예수님의 족보임에도 루카 복음서의 족보(루카 3,23-38)와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루카의 족보는 모친 마리아의 것이기에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두 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다윗, 이사이, 야곱, 이사악,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상이다. 예수님 족보에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기라성 같은 인물을 총망라한 점이 우선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인물은 다윗이다. 그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든 바 있는 메시아로 존경을 받았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활동할 당시 유다인들이 강력한 희망을 걸고 있었던 메시아의 출현, 곧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을 충족시킬 기린아로서 예수님을 간주했던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족보에서는 민족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위인으로 예수님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발견된다. 어디 그뿐인가? 창녀 라합, 이방 여인으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룻, 행실이 바르지 않았던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 등은 하느님의 특별한 돌보심에 힘입어 그 어떤 역경도 이겨 낸 가문의 전통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보는 의미의 역사다 족보는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의미의 역사다. 따라서 족보의 사실 여부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확인하려는 시도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족보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마태오 복음서의 족보에 나오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대해 마지않았던 ‘메시아’이므로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며, 여기에 요셉의 양자라는 사실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공백이 있는 혈통으로도 위대한 일을 하신 하느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 또한 아브라함과 구약성경 인물들의 맥을 잇는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태오보다 앞 세대의 바오로 같은 일부 반反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하찮게 여겨,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마태오의 눈에 이는 이스라엘 전통과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복음서 작가 마태오는 복음서를 쓰기로 작정했을 때 서두를 어떻게 열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집필 자료로 사용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사화라든가 부활 후 자세한 행적 등의 역사는 거두절미하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참역사가 시작된다고 보았다(마르 1,2-11). 이는 어딘가 한참 부족한 시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엄한 이스라엘 역사의 맥을 꿰뚫는 근사한 이야기로 예수님의 일생을 시작해야 마땅하다. 그분은 여느 인간과 다르게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며, 동방의 위대한 점성가들이 찾아와 경배할 정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분이며,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헤로데 대왕마저 어린 예수님을 처치하지 못해 안달 냈을 정도로 뛰어난 분이다(마태 1,18-2,23 참조). 그러니 예수님의 역사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것으로 해야 한다. 하느님의 돌보심은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를 시원하게 관통한다. 앞의 관점을 고려하면 복음서를 시작하기에 예수님의 족보처럼 적당한 도구는 없어 보인다. 세상을 품는 웅장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박 씨 족보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초라할 뿐이다. 혹시 모른다. 내가 죽고 나면 박씨 족보에 대학 총장, 아니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박00 박사쯤으로 출세를 시켜 줄지. 그리되면 20년 시간 강사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내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를 풀이하다 보니 온갖 잡생각이 다 든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1월호(통권 478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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