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태오 복음서] 좋은 몫을 택한 제자들 : 제자상의 재발견 나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 독일에서 학위를 받을 때까지, 제도권과 비제도권 교육에서, 그리고 갖가지 사회 경험에서 많은 분에게 배울 수 있었다. 그 모든 교육을 통해 과거의 내가 있었고, 오늘의 내가 있고, 내일의 내가 있을 것이다. 아마 누구나 동감하는 교육 경험일 터다. 많은 스승 중에는 나의 성장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분도, 극히 미미해서 거의 생각조차 나지 않는 분도, 악연처럼 기억되는 분도 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니 반면교사(反面敎師)니 하는 말이 있으니 나쁜 스승도 스승이라 불러 마땅할까? 내 경험에 따르면 나쁜 스승이란 지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요령의 대가(大家)로, 학생과 인격적인 만남을 중시하지 않는다. 요즘 주목받는 인터넷 강의 강사들이 대표적인 예다.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나 교육철학은 사치에 불과하다. 그저 입시교육에 맞선 순발력만 발달했을 뿐이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 중에도 그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23,4)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이 전적으로 입신양명과 생계 수단이 되면 율법 학자 꼴이 나는 것이었다. 마태오 복음에는 이상적인 사제 관계도 자주 발견된다. 마태오 복음의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머물지 않았다. 마태오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역사의 예수님에게 소급시켜 그분과 고락을 같이했던 제자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그 증거가 12,49-50에 나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의 가족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디 집필 자료로 사용한 마르 3,34-35에는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군중)을 둘러보시며’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는 마태오가 마르코 복음의 ‘군중’(오클로스)을 ‘제자’(마테테스)로 바꾸어 제자들의 위상을 눈에 띄게 한 편집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으로서 제자들은, 첫째로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 머물며 그분이 드러내는 계시의 증인 역할을 담당하고(8,18.23; 14,22.26),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차적으로 접하는 청중이었다(5,1; 13,36-53). 둘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추종한 이유는 기적 능력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메시아적인 요구에 응답한 것이다(10,37-39.40-42; 19,27-30). 즉 맹목적인 군중과는 달리 확고한 의지와 소명감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셋째로, 예수님은 제자들만 모아 따로 비유의 진정한 뜻을 설명하고(13,10.36-50),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셨다(8,23-27; 14,22-33).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올바로 이해했다는 표현을 종종 한다(13,51; 14,33).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군중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담당한다. 음식 기적(14,13-21; 15,32-39)에서 제자들은 군중의 허기와 열악한 형편을 예수님에게 전달하고 예수님이 강복한 음식물을 군중에게 날라다준다(14,15.17.19; 15,36). 그런가 하면 10,1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군중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이 네 가지 점을 근거로 마태오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근거리에 있으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이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그에 비해 마르코 복음의 제자들은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종종 등장한다(마르 4,13; 6,52; 7,18; 8,14-21 등등). 그러나 워낙 배운 것 없는 어부나 세리 등의 하층 계급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그런대로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스승은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14,34) 밤새워 기도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14,32-42), 자신의 안전을 위해 스승을 부인하고(15,66-72),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자 일시에 줄행랑을 놓은 것을 보면, 아무리 무식한 제자들이지만 솔직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마태오 복음의 제자들은 혈연을 넘어선 진정한 가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마르코 복음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인물들로 그려진 것에 비하면 제자들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셈이다. 아니면 제자상의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십 년 전쯤 대학 시절 은사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댁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빈민사목을 오래 하신 정일우 신부님인데 몸이 많이 약해지셨다고 했다. 아무튼 화곡동 예수회 공동체로 가면서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으나 워낙 뵌 지 오래돼 얼굴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에 들어서서 신부님의 눈을 보는 순간 돌연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 저 눈빛!’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마 스승의 눈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아, 살아 있는 저 눈빛!’ 저분만 좇으면 내 인생의 문제가 확 풀릴 것만 같은 느낌! 스승과 제자는 인격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서조차 수준 있는 만남을 기대하기 어렵다. 높은 학점과 스펙 쌓기에 노예가 된 학생들이 교수를 바라보는 눈은 취직과 출세의 효율성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교육의 초라한 현주소다.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달랐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큰 감명을 받았고 자신들의 인생을 새로 재단하기에 이른다. 지레 패배감에 젖어 있었던 초라한 처지에서 벗어나 복음 선포자로서 거듭난다.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되던 때,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배신하거나 전원 줄행랑을 놓았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사생결단의 신념에 가득 찬 사도로서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았다. 스승의 막강한 영향력에 힘입어 변화된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스승을 지금도 한 분 모시고 있다. 신앙의 아버지이자 학문의 아버지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분이다. 죽고 나서 하느님 앞에 서면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약간의 자랑도 할 작정이다. 그러면 지존하신 하느님은 몹시 흐뭇해하실 것이다. “박 신부, 자네는 내가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네그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좋은 몫을 택했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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