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요한이 잡히고 난 후에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마태 1-2장; 루카 1,5-2,40)와 어린 시절의 일화(루카 2,41-52)를 다룬 전사(前史)가 나오지 않는다. 전사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이미 모두가 아는 이야기라 따로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고, 아예 전사를 가볍게 여겼을 수도 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중요하지 사생활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지 않은가. 복음서 저자로서 마르코는 예수님 사건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고 결국 예수님의 공생활만 집필 범위로 삼았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었고, 무화과나무를 순식간에 말라 죽게 했으며, 어린이를 유난히 사랑했고, 종교 지도자들과는 종종 논쟁을 벌였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이 고향을 떠나 공적인 활동을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1,1-11). 요한에게 받은 세례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표시였던 것이다. 그에 걸맞게 마르코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이 제법 나온다. 8,27-28: … 그리고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9,11-12: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1,29-3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이 본문들을 면밀히 살펴볼 때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관계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했을 것이고,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언급이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① 먼저 예수님은 환생한 세례자 요한, 혹은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불렸다(8,27-28). 이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세례자 요한을 연상시켰거나,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 운동을 이어가는 후계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에는 요한이 유다 전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이스라엘 전역에 세례 운동(혹은 ‘대각성大覺醒 운동’)을 펼치면서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회개를 요구했다. 요한의 죽음을 다룬 6,14-29에 보면 (항간에 떠돌던 소문을 수집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요한의 정치적 입지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② 당시 요한의 입지가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요한의 아류로 취급 받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예수님이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마르코 복음은 요한을 메시아의 출현을 알리는 선구자 역할을 담당한 인물로 그린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참조 집회 48,10-11). 이 구절 때문에,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는 종말이 오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9,11-12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은 메시아 출현을 전제로 한 것이다. ③ 마르코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1,29-30에서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율법 학자들이 던진 28절의 질문이 중요하다. ‘성전을 뒤엎을 수 있고 율법을 자유자재로 해석하고 함부로 구원을 선포하도록 누가 권한을 주었는가?’ 사실, 예수님의 권한은 세례자 요한에게 받은 게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의 반문(30절)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입지(세례자 요한의 후계자)를 일거에 뒤집는 통쾌한 발언이다. 생애 마지막 예루살렘에 들어서는 순간, 예수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앞의 세 가지 근거에 따라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복음서 저자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 당연히 요한의 제자였으리라는 편견을 깨뜨려야 했고, 여전히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그리스도인들(루카 7,18-23; 사도 18,24-19,7 참조)에게 확실한 선택을 요구해야 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은 처음부터 선포한다. 1,7-8: …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어서 세례를 받고 뭍에 오르자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등극하고(1,9-11),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은 후에 세상으로 나와 첫 말씀을 터뜨린다. 궁(宮) 안에 있던 코끼리마저 다리가 풀리게 만들었던 사자후(獅子吼)를 던진 것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예수님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공생활을 시작했고,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후’이다(14절). 요한의 시대는 지나가고 예수님의 시대가 힘차게 시작되었으니 요한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야 옳다. 성서학계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정의한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구약(舊約)시대는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신약(新約)시대가 열렸다. 마르코는 이렇게 복음서의 시작을 장식했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2월호(통권 491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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