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 베드로는 어쩌다가 수제자가 되었나? 베드로는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다. 베드로 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수제자였으며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후 예루살렘 모교회의 수장으로 1세기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갈라2,9), 순방하는 곳곳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니(1코린 9,5)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던 일화들을 떠올리면 수제자의 맘이 마냥 편했을 것 같진 않다. 베드로는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예수님 앞에서 돌아가신다는 게 무슨 소리냐며 펄펄 뛰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호된 꾸지람을 들었고 (8,32-33), 예수님을 배신한 바 있으며(14,66-72), 지조 없이 갈팡질팡하다가 바오로 사도에게 호되게 당한 전력이 있다(갈라 2,11-14). 특히, 갈라디아서와 마르코 복음이 쓰인 시기가 기원후 50-70년이라는 점과 베드로 전승들은 그보다 훨씬 전에 성립되었으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베드로 자신도 교회 내에서 오가는 자신의 일화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원래 발보다 빠른 게 말이지 않는가. 이른바 수제자라는 사람이 그 정도였으니! 지난 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동체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부자 청년을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게 예수님의 공동체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쯤이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일종의 공동체 원칙이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먼저 제자들을 모았는데 제자들의 소명사화가 제법 여러 곳에 나온다(1,16-20; 2,14; 3,13-19). 그중 열두 제자의 명단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이들은 고향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선 출가(出家)제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재가(在家)제자들도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몇몇 제자를 꼽아 보면, 회당장 야이로(5,22), 베타니아의 나병 환자 시몬(14,3), 예수님의 무덤을 마련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15,42-47), 그리고 예수님의 친구로 불린 라자로 등이 있다(요한 11,1-44). 이들에겐 각자 사는 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책임이 주어졌다.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5,18-20). 출가제자가 되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가족과 생계를 떠나야 했음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과정도 그리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이들에겐 충분한 교육과 단단한 마음가짐이 필수였겠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영 시원치 않아 보인다. 아니, 마르코 복음의 제자들은 오히려 한심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모른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종종 책망했는데, 그 표현도 다양하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8),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21),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4,13),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40),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7,18)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제자들만 불러 모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교육을 시켰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따로 풀이해 주고(4,13-20), 마음이 무디어진 제자들에게 충격요법을 사용하며(6,45-52), 간단한 말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 부득불 다시금 풀어 설명하고(7,17-23), 마침내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라며 제자들의 무능력을 탓한다(9,19).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면 예수님이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다짐도 꼽을 수 있다. 병자들을 고치고 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다짐을 하고(1,34.44; 7,36), 더러운 영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리며(1,25; 3,12), 기적을 목격한 이들에게조차 소문내지 말라고 한다(5,43; 7,36). 그리고 예수님의 변모(變貌)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도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9)고 단단히 당부를 한다. 정리하면 ‘몰이해’, ‘특별 교육’, ‘함구령’을 제자들의 대표적인 모티브로 꼽을 수 있다. 독일의 성서학자 브레데(W. Wrede)는 이 세 모티브를 바탕으로 이른바 ‘메시아 비밀 사상’이 마르코 복음의 편집 사상이라는 주장을 폈고,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투영된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세 모티브를 통해 메시아인 예수님의 존재가 공생활 기간에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가 종국에 드러난 것처럼, 십자가 사건도 겉으로는 실패로 보이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발한 목적은 분명하다. 함께 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대해 배우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협력자의 역할을 맡기려는 것이다. 제자들의 입장에선 추종과 파견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것이 같은 사람들을 두고 ‘12 제자’와 ‘12 사도’라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한 대로 마르코 복음의 제자상은, 제자 선발이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허약하다. 제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있다. 예루살렘으로 행진해 들어갈 무렵, 거사 성공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을 때 높은 자리를 미리 부탁하고(10,35-45), 스승은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 밤새워 기도하고 있는데 옆에서 한가하게 잠이나 자고(14,32-4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자 일시에 줄행랑을 놓은 것을 보면, ‘메시아 비밀 사상’이 아니더라도 솔직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약한” 자들, 곧 제자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일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뿌려 놓은 씨앗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수확을 내게 될 것이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4,8). 베드로는 평생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살았을 테고 끊임없는 자성(自省)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했으리라. 뒤만 돌아서면 “저 사람 베드로, 멀쩡해 보이지만 세 번이나 배신했다네 그려” 하는 소리를 주위에서 해 대는 판이었다. 베드로의 삶에 드리워진 멍에가 충분히 짐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가장 깊은 영성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 선택은 두말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9월호(통권 498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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