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 걷는다 - 마르코 복음서(마지막 회)]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이전의 대통령과는 다른 몇 가지 점이 언론을 탔다. 새 대통령은 십수 년 된 구두와 안경을 착용할 만큼 검소하고 식당에서 전용차 운전사의 빈 그릇을 대신 치워 줄 정도로 겸손하며 웃옷을 벗고 수석 회의를 주재하는 소탈한 인물이다. 게다가 출근 때는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약간의 잔소리까지 듣는 서민적인 모습도 있다. 전(前) 대통령은 소통이 안되고 가족도 없는 외톨이로 늘 혼자 지내며 최고급 의상에 전용 화장실까지 필요했다. 그러니 누가 과연 양쪽을 비교하지 않겠는가?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도 전적으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메시아 출현에 대한 기대가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고 한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유다교 종교 권력의 압제, 잦은 기근과 재해까지 겹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백성의 살림살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 무엇인가 획기적인 사건이 필요했고 이를 구약성경의 위대했던 시절에 투영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윗 같은 영웅, 곧 ‘메시아가 다시 나타나 우리를 이끌어 주면 좋으련만!’ 이런 기대를 걸기에 적합한 인물이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백성을 가르치고 수시로 치유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의 심신을 달래 주었으며, 과단성 있는 행동과 말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벗겨내 억눌린 백성의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백성의 추앙을 받던 세례자 요한마저 예수님을 존경했다고 하니 도대체 이런 사람이 아니면 과연 누가 메시아일 수 있을까.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함구령이라든가(1,25.34 등), 제자들의 몰이해라든가(4,13.40 등), 제자 특수교육(4,10-25.34 등)이 그 증거다. 그러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직전 예리코에 도착했을 때 별난 일이 터졌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10,48-50). 바르티매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와 같은 뜻의 호칭이니 이제까지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겨 왔던 예수님의 행적을 볼 때 예외적인 경우였다.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불러 그의 병을 공개적으로 고쳐 주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일행에 동참시켰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환히 밝히기(11-13장) 직전에 ‘치유 기적’ 한 가지를 먼저 보여 준 것이다. 혹은 바르티매오가 비록 맹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참 정체를 알아보는 혜안慧眼을 지녔다는 말일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한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12,35-37) 이때 예수님은 구약성경 시편을 인용해서 다윗마저 주님으로 섬긴 분을 어찌 다윗의 후손이라 부를 수 있냐고 역질문을 하여, 당신이 결코 ‘다윗의 뒤를 잇는 메시아’, 세상의 기대에 들어맞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르티매오의 ‘다윗의 자손’과 이곳의 ‘다윗의 자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메시아와 실제 메시아였던 예수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어느 시대에도 이룩해 내지 못한 업적을 세웠는데, 남북의 열두 지파를 통일했고 국력을 키워 주변 나라들에서 조공까지 받을 정도였다. 막강한 통솔력과 뚜렷한 소신을 가진 예수님 역시 다윗 못지않은 행동으로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부활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무장 혁명을 꿈꾸던 열혈당원들에게는 예수님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백성이여 봉기하라. 나라를 뒤집어엎읍시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총독에게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다. ‘메시아’라는 호칭을 두고 1세기 교회는 고민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메시아를 훌쩍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분으로 예수님을 부각해야 했던 것이다. 우선 예수님이 온 유다 땅에서 메시아로 추앙받았다는 현실에 눈감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메시아가 기적을 베풀었다’는 기록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바르티매오를 통해 메시아 상을 새롭게 정의 내릴 수 있으니, 곧 기적 능력을 가진 메시아인 것이다(10,46-52). 알다시피 마르코 복음에서 기적이란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권위가 예수님에게 주어졌음을 알려 주는 표시이며, 하느님에게만 적용되는 용어(Kyrie elé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예수님에게도 적용한 게 그 증거다. 기존의 메시아와 전혀 다른 정체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수님은 부정한다. 예수님은 다윗이 섬겼으면 섬겼지 결코 그의 후손이 될 수 없는 ‘다윗의 주님’이다(12,35-37). 인류는 이제까지 ‘메시아주의’를 표방하는 사상을 많이 접해 왔다. 최근의 예로 ‘백두혈통’이라는 북한의 시대착오적 발상이나 지난 세기말에 나왔던 [매트릭스]라는 영화도 ‘메시아주의’를 표방한다. 오늘의 교회 역시 예수님을 일컬어 ‘메시아’로 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메시아가 원래 정치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태반이다. 그러니 아무 단서 조항 없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는 것은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고민을 외면하는 일이다. 복음서 작가 마르코도 같은 고민을 했고 예수님이 결코 이스라엘식 표상에 맞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분은 고난받는 메시아이자, 기적을 베푸는 메시아, 다윗마저 섬겼던 메시아다. 메시아라는 이름을 섣불리 붙여 예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 주변에서도 정치적인 메시아로 그분을 받들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테다. 성질 급한 베드로나 열혈당원이었던 시몬(3,18)이 그 중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 박태식 신부는 대한성공회 소속으로 월간 <에세이>로 등단, 월간 <춤>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입문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에 출강하며,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으로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11월호(통권 500호),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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