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와 거울 보기 (4)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서정주 시인은 국화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같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거울 앞에 선 누님’이란 아마도 인생의 원숙한 단계에 이른 상태에 대한 은유일 것입니다. 이 은유가 가능한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원숙함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입니다. 탈출기라는 거울 앞에 서려는 우리의 노력은 하느님처럼 완전한 자, 원숙한 자가 되라는 초대에 응하려는 지난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달에 우리가 들여다보게 될 거울은 탈출기 3장의 본문입니다. 탈출기 3장은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다시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를 설명하는 단락(3,1-4,17)에 속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긴 단락을 ‘모세의 소명사화’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으며, 그 부르심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모세는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긴 소명사화의 첫 부분인 탈출기 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3,1-6 ② 3,7-12 ③ 3,13-21 첫 번째 단락인 3,1-6은 모세가 하느님의 신현(theophany)을 목격한 장면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소명사화의 첫 번째 요소인 ‘하느님의 자기소개’에 해당합니다. 하느님의 신현, 곧 자기 계시는 모세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장인의 양 떼를 이끌고 광야로 나갑니다. 이번에는 그가 늘 다니던 곳보다 조금 더 멀리 나아갑니다. 신명기에서처럼 3,1은 모세가 간 산을 시나이 산이 아니라 호렙 산이라고 합니다. 호렙은 광야를 의미하므로, 호렙 산이란 광야에 있는 불특정한 산을 지칭할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가시나무에서 불꽃이 일어나는데 가지가 전혀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그 나무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은 모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하시며,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훗날 여호수아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여호 5,15 참조). 신발은 땅의 온갖 먼지를 실어 나릅니다. 이 먼지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어울릴 수 없는 온갖 부정함과 불결함을 상징합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만 하느님 가까이 설 수 있습니다. 모세를 찾아오신 것처럼 일상의 삶 가운데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좀 더 가깝게 만나려면 우리도 신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어울릴 수 없는 내 안의 부정함이 무엇인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다 벗어 버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모세 역시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온전히 깨끗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먼저 그를 찾아와 그에게 신을 벗도록 초대하십니다. 그가 묻혀 온 온갖 부정함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분 가까이 머물기 위하여,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신은 무엇일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벗어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6)이라고 소개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선조와 관계를 맺어 오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심으로써 하느님은 모세를 다시 그의 동족들과의 관계 속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 살면서 미디안 사제의 사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으로, 당신이 선택하고 축복하셨으며 약속을 맺으신 그 백성의 일원으로 돌려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의 본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만난 이들에게도 모세가 경험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느님 앞에 서면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 또는 ‘가지지 않은 것’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우리의 ‘참 자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과연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듯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을 가장 몰라주는 이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 모릅니다. 자신을 가장 소외시키고 무시하는 이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 선 모세처럼, 하느님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세처럼, 우리도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께서 나를 보시듯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좀 더 자주 바라보고, 그 모습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본 이들을 당신의 사명으로 초대하십니다. 둘째 단락인 3,7-12과 셋째 단락인 3,13-21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모세가 하느님의 이 초대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 역시 우리에게 좋은 거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 거울은 다음 달을 위하여 잘 간직해 두겠습니다. * 김영선 수녀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미국 보스톤 칼리지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였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구약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4월호(통권 481호), 김영선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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