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야고보 서간 (6) 공동체와 사회윤리 야고보서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에 가톨릭 교회의 사회윤리를 발전시키는 데에 매우 중요한 문서이다. 야고보서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기도 중에만 만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직접 만나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물질을 향유하며 사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숙제이다. 그 외의 영적인 것은 하느님께서 충분히 채워 주실 것이다. 야고보서가 성경의 다른 문서들에 비해 신학적 논리가 부족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약한 이들을 도와주라는 이 당연한 가르침에 무슨 신학적 논거가 필요하겠는가! 야고보의 가르침은 그 윤리적 당위성 때문에, 그 어떤 말로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매우 단순하고 강렬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자는 나쁜가?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했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복되다’고 가르치지만, 또 한편으론 부자 되라는 그 말에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가난한 사람들도 있지만, 부자들 역시 교회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고 부자들은 비난하는 말씀들을 자주 대한다. 가난한 이들은 위로를 받겠지만, 부자들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심지어 부자와 죄인을 거의 동일시하는 성경 구절들도 있다.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만 감싸는 것일까? 부자들은 과연 부자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죄인인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는 재물을 가진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도와줄 것을 권고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는 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부유한 이들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오히려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야고보서의 비난은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고, 그 재물을 좋은 일에 쓰지 않은 채 움켜쥐고만 있는 부자들을 향한 것이지, 모든 부자를 향한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가 경고하는 부자들은 일꾼들에게 정당한 품삯을 주지 않고, 올바른 이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하고, 빼앗은 결과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이다(5,4-6). 그렇게 모아들인 그들의 재산은 단 한 번도 타인을 위하여 사용되어 본 적 없이 차곡차곡 쌓여만 있었기에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5,2-3). 이것이 바로 죄악인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죄악이 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도 잠식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사치와 쾌락에 절은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이 환난을 겪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기름진 마음’(5,5)을 고발한다. 부유함은 그것이 타인을 향할 때는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으나, 자기 자신만을 향할 때는 하느님과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든다. 이미 기름진 마음을 더욱더 살지게 하며, 사람으로부터도 하느님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야고보서는 차별하지 말고 자비를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차별 행위는 그 자체로 죄악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다. 그것만이 우리가 모든 인간을 대하는 유일한 기준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 차별이 생겼다는 것은 곧 악이 세상의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차별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행위이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가장 큰 계명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결국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살인 등은 죄라고 인식하지만, 차별을 죄라고까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경고한다. 차별은 엄연히 범죄이며,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2,9). 이러한 주님의 심판을 이기는 길이 있으니, 바로 ‘자비’이다(2,13). 자비는 상상이나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비의 실천을 통하여 부자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가난한 이들은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을 향하여 건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윤리이다. 야고보와 사회정의 재력이나 권력이 옳지 못한 방식으로 사용됨으로써 발생하는 부정과 불의는 초대교회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직면한 도전이며 과제이다. 교회는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연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가 순수하게 영적 추구의 영역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도 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데 있다. 예수님의 삶은 순전히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기도는 예수님 활동의 원천이었음이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기도만 하시지는 않았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일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물질적·육체적 희생을 치르셨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가난하게 사셨고, 옳지 못한 권력 앞에서는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셨으며, 마침내 당신 육신과 생명까지 내놓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영적 가치만을 내세우며 물질적 차원의 희생을 외면하고 부정과 불의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직무 유기에 가깝다. 야고보서는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여타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장 직설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7월호(통권 484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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