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베드로의 첫째 서간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 베드로의 첫째 서간은 특정 공동체의 구체적 현안을 다루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나 태도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이 서간의 전체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으로써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의 시련을 견디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 가는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승리가 실현될 종착지에 도달할 때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도록 격려하며 이끄는 것이다. 이달에는 베드로의 첫째 서간 1,1-12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베드로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보자. 하느님의 자비로 새로 태어난 우리(1,3) 베드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로 서간을 시작한다. 이러한 찬미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신 그분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난 것이다. 이미 태어나 자연적 생명을 누리는 상태에서 그리스도로 인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베드로는 그것을 희망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며 그분의 몫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활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이것이 바로 하늘에 보존되어 있는 우리의 몫이며, 우리 희망의 근원이다. 새로 태어난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하늘의 상속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희망과 감사로 시작한 메시지는 곧바로 시련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는 하늘의 상속이라는 복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시련도 함께 찾아온다. 이 시련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야 할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그 해법을 찾도록 이끈다.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1,7)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즐거워하라고 독려한다(1,6). “즐거워하십시오”의 원어는 ‘기뻐 용약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아갈리아오’(agalliao)의 명령형이다. 즉 ‘즐거워하라’는 베드로의 권고는 기뻐 뛰며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환희에 차 있으라는 의미다. 왜 이토록 즐거워해야 할까?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돼 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서간의 수신자들이 겪는 것은 갖가지 시련이요 슬픔이다. 그럼에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왜일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재의 복락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현재의 시련으로 얻어지는 것은 금보다 귀한, 순수한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현재의 시련이란 무엇일까? 베드로의 첫째 편지는 정치적 박해를 배경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박해하진 않았더라도 사회적 박해의 가능성까지 배제되진 않았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 과거의 악습을 끊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릇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질시와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이들은 근거없는 비방, 따돌림, 그리고 거짓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감으로써 당하게 되는 다양한 시련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시련 때문에 포기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시련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참 신앙이기에 시련은 황금보다 더 귀한, 순수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기도 하다. 시련을 이겨 내기는 쉽지 않고 많은 사람이 시련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에, 그것을 이겨 낸 신앙은 황금보다 더 귀하다. 또한, 시련 중에도 무너지지 않는 믿음은 그 믿음 속에 자기를 위한 욕심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만 채워진 믿음이기에 순수하다. 결국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 시련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현재의 시련을 이겨 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분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믿는 복된 이들이라고 칭송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베드로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세례로써 새로 태어날 때 무엇을 약속받았던가?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 우리가 취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던가? 예수님만 믿으면 이 세상에서 평안과 번영을 누리리라고 내심 기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베드로의 가르침은 그런 헛된 약속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다. 신앙인의 삶에서 시련은 필수이며, 믿음은 시련을 통해 증명된다. 그 길이야말로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힘으로 맞서지 않으셨다. 하느님께 청하시기만 하면 천사들의 군대도 부르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마태 26,53). 그분의 방법은 시련과 십자가 앞에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는 것이었다. 그로써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과 우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황금보다 더 귀한, 순수한 믿음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새로 태어나는 이들,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 신자로서 사는 모든 이들이 근본적으로 지녀야 할 마음 자세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락을 바라고 믿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금보다 더 귀한 초월적 가치를 향하여 우리를 개방한 것이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6년 9월호(통권 486호), 강은희 헬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