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서간에서 보물 찾기 - 유다 서간 (1)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유다 서간은 가톨릭 서간 중 가장 마지막에 수록돼 있다. 그동안 우리는 야고보 서간과 베드로의 첫째 서간을 읽었는데 벌써 신약의 마지막 서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순서대로라면 베드로의 둘째 서간을 읽어야 할 듯싶지만, 베드로의 첫째와 둘째 서간은 저자의 이름만 공유할 뿐, 내용상 관계는 없다. 오히려 유다 서간과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 공유하는 내용이 많으며, 학자들 다수는 베드로의 둘째 서간이 유다 서간의 내용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앞서 유다 서간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자는 누구일까?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야고보의 동생 유다”라고 소개한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사도 15; 갈라 2 참조).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의 동생으로 소개함으로써, 이 서간이 제1세대 그리스도 공동체들이 목격하고 보존해 온 권위 있는 전승임을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주님의 명을 받들어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한 많은 이가 주님의 종으로 불려 왔다. 아브라함(창세 26,24), 모세(탈출 14,31; 여호 1,13), 여호수아(여호 24,29), 다윗(2사무 3,18; 1열왕 8,66), 예언자들(2열왕 21,10), 예수님(사도 4,27), 사도들 및 선교사들(사도 4,29; 2티모 2,24)이 모두 주님의 종으로 불렸다. 저자 역시 자신도 이러한 전통적 직무를 이어 가고 있으며, 따라서 이 서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는 것이리라. 왜 이 서간을 썼을까? 유다 서간은 단 하나의 장으로 이뤄진 아주 짧은 서간이다. 그 내용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침투해 있는 위험한 이들에 대한 경고다(4.11.18절). 유다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멸망뿐임을 강조한다. 그들은 불경한 자들이며 하느님 은총을 방탕한 생활의 방편으로 악용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4절). 불륜과 변태적 욕망으로 몸을 더럽힌 자들이며, 주님의 천사들을 모독하는 자들로서, 오류에 빠져 반항하다가 멸망할 자들이다(7-8.11절). 또한 불평꾼, 불만꾼이며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이들이고, 아첨을 일삼는 이들이다(16절).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나 전설에서 하느님과 대적해 멸망을 자초했던 사건들과 그들을 연결함으로써, 그들의 운명 역시 멸망으로 끝날 것임을 예고한다. 소돔과 고모라(7절)나 발라암과 코라(11절) 등 구약성경의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고, 이탈한 천사(6절)나 떠돌이 별(13절) 등 외경에서 따온 표현도 보인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있는 이름일지라도, 그와 관련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아는 내용과는 다른 부분들도 있다. 이는 어찌된 것일까? 외경의 권위와 인유 유다 서간의 대부분은 인유이다(5-16절). ‘인유’란 저자와 독자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내용을 끌어다가 비유로 삼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가르침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것에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결하는 것이다(5절). 구약성경의 사건 그대로를 인유했다면, 구약의 내용을 아는 독자들은 누구나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저자와 독자들은 공유하고 있었지만 오늘날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원천에서 인유한 것이라면, 그 내용이 당대에는 쉽게 받아들여졌겠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유다 서간은 가톨릭 교회의 정경인 구약성경 외에 외경도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다. 외경의 풍부한 이야기들은 구약성경의 배경지식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약성경과 다른 내용을 전하기도 한다. 그 한 예가 발라암이다. 발라암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상속하는 것을 막으려는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고용한 예언자다(민수 22-24장). 발라암은 돈을 받은 대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구약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발라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외경은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서간에서는 발라암을 돈에 눈이 어두워 오류에 빠진 자로 제시한다. 이는 외경에 나오는 발라암 이야기를 인유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유다 서간이 정경보다 외경을 택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구약성경과 외경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면 당연히 외경보다는 정경인 구약성경의 내용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정경의 범위가 확정된 것은 유다 서간이 기록된 시기보다 더 후대의 일이다. 따라서 유다 서간이 외경을 인유한 사실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외경의 가르침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하게 하는 부분이다. 성경을 중요시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만을 진리의 전부로 여긴다면 성경은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말 것이다. 하느님은 성경보다 훨씬 더 큰 분이시다. 성경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앎이 깊어 갈수록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하느님에 관한 무수한 증언 중 지극히 일부분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강은희 님은 미국 The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수학하였으며(성서학 박사), 현재 부산가톨릭대학교와 동 대학교 신학원에서 성경 전반에 걸쳐 강의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7년 3월호(통권 492호), 강은희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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