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인물 열전] 라멕 창세기에는 라멕이라는 인물이 둘 나온다. 하나는(4,19) 세상에 폭력을 더했고, 다른 하나는(5,28)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 휴식을 가져올 노아를 낳았다. 두 라멕은 묘하게 닮았으면서도 전연 다르다. 이번 호에는 두 라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첫째 라멕은 카인의 후손이며, 아담에게는 7대손이 된다. 살인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인물이다(4,22-23). 둘째 라멕은 셋의 후손으로 아담에게 9대손, 에노스에게 7대손이다. 셋은 카인과 아벨 사건 이후 아담과 하와가 낳은 또 다른 아들인데(5,3), 허망하게 죽은 아벨의 자리를 채우도록 하느님이 주셨다. 카인의 후손 라멕은 세상을 폭력으로 물들이는 데 기여하지만, 셋의 후손 라멕은 원죄 때문에 저주받은 땅(3,17)에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인류가 위로 받기를 바랐다(5,29). 두 라멕의 이미지는 까마귀와 백로처럼 상반되지만, 공통점 또한 많다. 그들의 이름뿐 아니라 저마다 7대 조상이 되는 ‘아담’과 ‘에노스’의 이름 뜻도 같다. 둘 다 ‘사람’을 뜻한다. 숫자 7의 모티프도 공통된다. 첫째 라멕이 지은 노래에 7과 77이 나오고(4,24), 둘째 라멕의 경우에는 세상을 산 햇수가 777년이다(5,31). 카인의 후손 라멕 그리고 도시 문명 원조들이 선악과를 먹은 효과를 반증이라도 하듯, 인류 역사는 태동하자마자 폭력으로 물들었다(4,1-16). 도시 문명은 동생을 살해한 카인에게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카인이 “성읍”을 세웠다는 4,17에서 추측할 수 있다. 농부로부터 도시 문명이 싹트게 되었다는 성경의 관점은 실제 역사와도 잘 부합된다. 고대 문명을 대표하는 ‘방목 기술’(20절), ‘음악’(21절), ‘금속업’(22절)도 카인의 후손인 “야발”과 “유발” 그리고 “투발 카인”에게서 발전한다. 그런데 이들 셋 모두 라멕의 직계 아들들이니, 라멕은 도시 문명의 선구자들을 낳은 셈이다. 라멕은 아랍어로 ‘강한 젊은이’를 뜻한다. 이름 뜻처럼 실제로 강한 남자였으며, 아무도 자기를 건드릴 수 없다고 자신감을 표출한다(23-24절). 옛 유다 전승에 따르면 카인을 죽인 이도 라멕이었다고 한다. 라멕은 맹인이었는데, 아들 투발 카인의 인도를 받아 사냥에 나갔다가 카인을 짐승으로 오해하고 쏘아 죽였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라멕은 성경에서 최초로 두 아내를 거느린 인물로도 나온다. 라멕 때부터 일부다처제가 시작된 셈이다. 첫째 아내 ‘아다’는 ‘새벽’을, 둘째 아내 ‘칠라’는 ‘어스름’을 뜻한다. 이는 도시 문명이 새벽빛처럼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 주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도 존재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라멕의 맏이 야발은 목축업의 선구자로 소개된다. 고대 근동에서 목축은 농경과 더불어 경제를 지탱하던 기둥이었다. 둘째 아들 유발은 비파와 피리를 만든 음악의 선구자다. 피리는 관악기를 통칭하는 용어로 보인다. 비파는 히브리어로 ‘키노르’라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유일한 현악기다. 다윗이 이 악기를 즐겨 연주했고(1사무 16,23), 갈릴래아 호수의 히브리어 이름 ‘킨네렛’이 ‘키노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셋째 아들 투발 카인은 금속업을 발전시킨 이로 나온다. 수메르어와 아카드어에 기초하면, 투발은 ‘금속 기술자’를 의미한다. ‘카인’은 ‘획득하다’, ‘짓다’, ‘대장장이’라는 뜻이다. “구리”와 “쇠”가 언급되는 걸로 보아, 당시가 청동기와 철기 문화가 시작된 즈음임을 짐작하게 한다. 투발 카인이라는 이름은 창세 4장에만 나오지만, ‘투발’이라는 민족은 이후에도 성경에 이따금 등장한다. 주로 ‘메섹’과 짝을 지어 나오는데, 금속 용기 제작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투발과 메섹이 무역하던 상품으로 “구리 연장”을 언급했다(에제 27,13). 투발 카인 시대부터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면 무기도 제작할 수 있었을 테니, 살상과 전쟁도 빈번했을 법하다. 끝내 홍수의 재앙이 닥친 것으로 보아, 음악의 발전 또한 퇴폐적 향락으로 타락한 듯하다. 게다가 세 선구자의 아버지인 라멕은 살인까지 자랑스러워한다. 어쩌다 자기한테 상처를 입힌 소년을 그 보복으로 가차 없이 죽였다고 떠벌린다. 더 가관인 건 마치 암흑가의 보스처럼 자기를 건드리면 일흔일곱 곱절로 갚아 주겠다고 복수를 선언한다는 점이다(4,23-24). 하느님은 카인을 해치는 자에게 일곱 곱절로 돌려주시지만, 자기는 그 이상이라고 호언장담한다. 라멕의 이야기는, 도시 문명이 의롭지 못한 자에게서 발전했다는 관점을 드러낸다. 이는 창세 3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원조들이 선악과를 먹고 느낀 죄책감 때문에 문명의 상징인 ‘옷’이 생겼고(7절), 에덴에서 쫓겨난 결과 ‘농경 기술’도 발전하게 되었다(17-19절). 카인이 시작한 도시 문명은 라멕과 그 아들을 거치며 조금씩 타락해, 결국 온 세상을 폭력으로 채우기에 이른다(6,11). 노아의 아버지 라멕 흥미롭게도, 이렇게 속절없이 추락하던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춘 이도 라멕이다. 동명이인인 또 다른 라멕이 홍수를 견디고 인류 역사를 이어갈 노아를 낳는다(5,25-31). ‘휴식을 주다’라는 이름 뜻대로, 노아는 땅이 받은 저주에 종지부를 찍는다. 바로 그가 홍수 뒤에 하느님께 제물을 바쳐 인간 세상에 쏟아진 주님의 분노를 풀고,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도 그 위 생물들을 파멸시키지도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8,20-21).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에서 구약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 홀리랜드대, 서울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 신학교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2월호(통권 491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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