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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창세기 인물 열전: 멜키체덱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15,057 추천수0

[창세기 인물 열전] 멜키체덱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키체덱(14,18-20)은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인물임에도 그에 대한 정보 - 누구의 자손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죽었는지 - 가 전혀 없다. 다만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이었고, 옛 예루살렘을 다스린 임금이자 하느님을 섬긴 사제라는 점만 밝혀져 있다.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의 만남에서 두 사람이 한 행동도 수수께끼이다.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런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히브리서 7장은 기이해 보이는 멜키체덱의 존재와 행위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멜키체덱의 빵과 포도주는 성찬례의 예형이며,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는 그가 멜키체덱을 사제로 인정하고 존중했다는 것이다. 곧, 멜키체덱이 그리스도의 예형임을 밝힌다. 성체성혈 대축일에 창세 14,18-20을 제1독서로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호에서는 창세기의 멜키체덱이 어떻게 예수님의 예형으로 풀이되기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겠다.

 

 

멜키체덱과 아브라함

 

멜키체덱은 ‘정의로운 임금’을 뜻한다(히브 7,2). 그는 살렘을 다스린 임금이었다(14,18). ‘살렘’은 고대 예루살렘의 이름으로(시편 76,3), 평화를 뜻하는 ‘샬롬’과 어근이 같다.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을 만난 때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납치한 여러 임금과 전쟁(창세 14,1-16)을 치른 뒤였다. 임금들을 물리쳐 ‘평화’를 회복한 다음 ‘살렘’을 방문한 점이 상징적이다.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을 만난 곳은 “임금 골짜기”였다. 예루살렘 동쪽의 ‘키드론 골짜기’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을 환대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었다. 멜키체덱의 축복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12,1-3)을 회고하게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였다. 이에 아브라함은 자기 재산의 십 분의 일을 주며 예를 갖춘다. 멜키체덱이 하느님의 사자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는 민수기의 전리품 분배 율법(31,25-41)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전리품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롯이 빼앗긴 재물을 되찾아 온 것에 불과하지만, 전쟁 후 재물의 일부를 사제에게 주었다는 점이 같다.

 

멜키체덱과 아브라함의 사연이 창세기에 실린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직이 아브라함 시대에도 이미 예루살렘에 존재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예루살렘 임금이었음을 밝힘으로써, 훗날 예루살렘에 확립될 다윗 왕실과 레위 사제직의 정통성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편 110,4)

 

멜키체덱은 시편에서 다시 언급된다. 시편 110편은 다윗 왕실의 즉위식에 사용되던 의식용 시편으로 보인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1절), 곧 주님 옆에 좌정하라는 말씀이 즉위식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멜키체덱이 영원한 사제이듯 다윗 후손도 그처럼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임금이자 사제임을 천명한다(4절). 즉 이 시편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그 이전에 예루살렘을 다스린 멜키체덱의 예를 인용한다. 이 시편은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시편을 예로 들며, 메시아는 다윗 후손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임을 역설하신다(마태 22,41-46). 구약 시대에 정치 지도자는 다윗 후손이, 사제직은 레위인들이 맡았다. 그러다 예수님에게서 임금과 사제직이 합쳐진다. 곧, 예수님이 멜키체덱의 본을 온전히 실현한 유일한 예가 되므로, 예수님이 시편 110편을 완성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예형, 멜키체덱

 

히브리서 7장은 멜키체덱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기초가 되는 인물임을 증명한다.

 

먼저 멜키체덱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다(히브 7,3). 곧, 그는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사제로 남을 인물이다. 같은 사제라도, 족보가 분명한 레위인 사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히브리서 7장은 멜키체덱이 예수님의 예형임을, 곧 예수님이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히 사제임을 천명한다.

 

둘째,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었다. 축복은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것이므로, 멜키체덱이 아브라함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셋째,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바치던 예물이다(창세 28,22; 말라 3,10; 마태 23,23 등). 따라서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그가 멜키체덱을 사제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곧, 히브리서 7장은 레위인 사제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고유한 사제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 멜키체덱이라는 인물을 소환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사제직이 율법 규정에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느님에게서 직접 유래했음을 설명하려 했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창세기에 묘사된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의 행위가 훗날 예수님의 사제직을 예표하게 되었다.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에서 구약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홀리랜드대와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 신학원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6월호(통권 495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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