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인물 열전] 레베카, 빗나간 모성 ‘어머니는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그 위대함 속에는 상식을 넘어서는 무언가도 함께 존재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편애하는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애정이 덜 가는 자녀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레베카가 야곱을 위해 에사우를 희생시켰듯 말이다. 처녀 레베카 레베카는 히브리어로 ‘리브카’다. 이름 뜻은 ‘(가축 등을) 단단히 묶다’로 추정된다. 또는 라헬의 뜻이 ‘암양’이고 레아가 ‘암소’이듯, 그들의 고모이자 그들처럼 목축 일을 했을 레베카(Rebekah)도 ‘가축’을 뜻하는 바카르(bakar)와 관련 있는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보듯, 자음 순서만 바꿔 놓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이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지 않도록(24,3), 고향으로 종을 보내 신부감을 찾아오게 했다. 이 일은 아브라함이 생애 거의 마지막에 한 일이었으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곧 끝이 난다(아브라함의 죽음: 25,7-11 참조). 아브라함이 아들을 보내지 않고 대리인을 보내 혼인을 추진한 건, 이사악이 어렵게 얻은 아들인데다 그를 잃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22장)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은(23장) 뒤라, 아들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더했을 터이다. 이는 훗날 레베카가 야곱을 홀로 타지에 보내는 것과 대조된다. 레베카가 야곱을 떠나보낸 표면적 이유도 신부감을 찾기 위해서였다(27,46; 28,1-2 참조). 물론 레베카도 귀한 아들이 낯선 곳을 가다가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겠지만, 에사우의 보복이 두려웠기에(27,41-45)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 레베카의 성정은 아브라함의 종이 그를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처음 드러난다. 외모도 아름답지만, 매우 능동적인 여인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물을 청하자, 그의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주겠다고 제안하기 때문이다(24,16-20). 길손의 갈증을 풀어주려고 ‘급히’ 물을 길어 ‘서둘러’ 마시게 했다는 점에서(18.20절),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소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악과의 혼인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을 때는, 친정 가족에게 미련을 보이지 않는 단호함도 드러낸다(55-58절).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자마자 고향을 떠났듯, 레베카도 머뭇거림 없이 가나안을 향해 떠난 것이다.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쳤으며, 혼인 후에는 남편의 동의 없이 축복받을 아들을 바꾸는 독단성마저 드러낸다. 레베카의 모성적 사랑 혼인 당시 이사악의 나이는 마흔이었다(25,20). 레베카의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유다 전승은 13-14세로 추정한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호르의 손녀이므로, 이사악에게는 육촌 누이다. 아브라함은 이복 누이 사라와 혼인했고(20,12), 다윗의 맏아들 암논과 배다른 누이 타마르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2사무 13,13)에도 근친혼 관습이 암시된다(아직도 중동에는 근친혼의 잔재가 남아, 아랍인들은 사촌을 배우자감으로 선호한다). 당시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레베카에게는 그런 그를 보듬어 줄 만한 모성애가 있었던 것 같다. 이사악이 곧 위로를 받고 레베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24,67). 모성애에 숨은, 아름답지 못한 비밀 ‘편애’ 이사악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레베카는 이십 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어렵게 에사우와 야곱 쌍둥이를 낳는다. 이로써 친정 가족이 해 준, ‘수천만의 어머니가 되라’는 축복(24,60)이 이루어진다. 에돔과 이스라엘이라는 두 민족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단호한 성격 때문이었나? 이사악의 슬픔을 보듬어 주던 레베카의 모성애가 야곱에게만 쏠린 것이다. 유다교는 레베카의 편애에 대해 다소 편파적인 해석을 했다. 이사악이 에사우를 축복하려던 계획을 레베카가 일부러 엿들은 게 아니라(27,5 참조), 레베카가 예언자였기에 성령께서 알려 주신 것이라 한다. 이사악이 악한 에사우를 축복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말이다(창세기 라바 67,9; 65,6 참조). 하지만 이런 해석은 유다인들이 야곱의 후손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이 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말을 했다. 에사우와 야곱도 자기 부모에게 던져진 존재이므로, 그들 관계에 대한 책임은 많은 부분 부모에게 있다. 결국 레베카는 편애한 대가로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성경에 암시된 바에 따르면, 그 뒤 죽을 때까지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한 듯하다. 오점이 없어야 할 성조 역사에 부도덕함이 깃들어 있어 의문을 품게 하지만, 이는 부족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우리 세상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인 듯하다. 성경은 불완전한 인간의 잘못도 선으로 바꾸어 이끄시는(50,20 참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기에 경전이다. * 김명숙 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대에서 구약학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루살렘의 홀리랜드대와 가톨릭대 문화영성대학원과 수도자 신학원에서 구약학 강의를 하였고,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이다. [성서와 함께, 2017년 8월호(통권 497호), 김명숙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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