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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백성과 유배를 함께 겪은 예언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18 조회수8,329 추천수0

[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늘날의 예언자] 백성과 유배를 함께 겪은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4년 한국에서 ‘번영의 위험’을 경고하셨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지난날의 고생을 잊고 슬그머니 주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인간의 이러한 얄팍한 마음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의 출세와 나라의 번영을 꾀하다가,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탈출의 하느님을 잊고 주님에게서 마음이 돌아서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나라를 잃었고 온 백성이 고통에 빠졌다.

 

 

망국과 유배

 

유배 직전에 망국이 있었다. 나라를 잃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함락당할 때, 애가의 저자는 “인정 많은 여인들의 손이 제 자식들을 잡아 삶았구나. 내 딸 백성이 파멸할 때 자식들이  어미들의  양식이  되었구나.”(4,10)하고 울부짖었다.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목 놓아 울었다. “보소서, 주님, 살펴보소서, 당신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지. 여인들이 제 몸의 소생을 잡아먹어야 하겠습니까, 애지중지하는 그 어린것들을?”(2,20)

 

나라를 잃는 것은 현실적인 시련이었다. 임금과 땅과 군대를 잃었으니 이제 작은 백성을 지켜 줄 울타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백성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의미의 시련’이었다. 그들은 끝없이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 “하느님의 약속은 쓸모없게 된 것인가?” “하느님 백성의 미래는 이제 어떻게 될까?” “조상이 전해 준 전승은 이제 공염불이 된 것인가?” 이런 시련은 단순한 ‘종교적 질문’ 이상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했고, 이제 온 백성이 고아가 된 것 같았다.

 

 

지배 엘리트는 실패했다

 

유배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되짚는 계기였다. 왜 이 고통이 시작되었는지, 망국의 원인은 무엇인지,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백성들은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깨달았다, 오직 저항 예언자들만이 타락과 망국을 경고했음을.

 

엘리야를 필두로 한 비판적 예언자 또는 저항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을 이끄는 엘리트들의 믿음과 실천을 비판하고 고발했다. 상징 행위와 비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백성을 깨우치려고 애썼고 주님께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그렇지만 부패한 주류 엘리트들은 그러한 경고를 무시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느님과 다른 신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신교적 방식의 국가 운영을 통해서 위기를 이겨 내고 번영을 일궈 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또한 망국 직전까지 화려한 번제를 드리며, 다윗 왕조가 시온에서 영속하리라 선포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민족의 군대가 수도를 빼앗고 성전을 능욕했다.

 

바빌론의 장수는 이스라엘의 임금 “치드키야의 아들들을 그가 보는 가운데 살해하고 치드키야의 두 눈을 멀게 한 뒤 그를 청동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2열왕 25,7).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게 되면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사진처럼 평생 남는다고 한다. 치드키야 임금이 평생 간직하게 될 장면은 아들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이었다. 이보다 더 잔인한 것이 있을까? 이는 백성의 치욕이기도 했다.

 

 

세 갈래로 나뉜 백성

 

나라를 잃은 백성의 운명은 이민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백성은 세 갈래로 나뉘어야 했다. 먼 옛날 창세기의 조상 시대는 물론이고 이집트 종살이 시절이나 광야 시대에도 이 백성은 하나로 뭉쳐 살았다. 하지만 이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디아스포라 시대’가 열린 것이다.

 

먼저, 이집트로 간 백성이다. 이들은 아마도 기존의 지배 엘리트의 정책을 충실히 계승한 사람들일 것이다. 다신교적 혼합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대표적으로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대의 모든 지휘관들”(예레 43,5)은 이집트의 “타흐판헤스에 도착하였다”(43,7).

 

그들은 이집트 땅의 “믹돌과 타흐판헤스와 멤피스와 파트로스 지방에 살고” 있었다(44,1). 이들은 저항 예언자들과 끝까지 대척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집트로 들어가지 마라.”(42,19) 하고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정말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43,7).

 

이집트에서 이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구체적인 정보가 별로 없어 소상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평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은 다신교적 외교를 주장했던 자들로 보이는데, 역설적으로 국제 정세는 이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훗날 이집트 26왕조는 결국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 신바빌로니아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엘리트들의 운명은 편치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스스로 정체성을 포기한 하느님 백성은 결국 세속에 흡수될 운명이다.

 

둘째는 유다 땅에 남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알기는 힘들다. 다만 바빌론 총독이 어느 정도 느슨한 통치를 하여 비교적 살림이 괜찮았다는 기록과, 그 반대로 매우 궁핍했다는 기록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평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들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은 조상이 물려준 땅에서 이민족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기막힌 처지였다. 이들도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는 힘들었기에 슬픔과 울분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끝으로,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은 광야 시절과 무척 닮았다. 성전도 임금도 나라도 없이 살아야 했다. 언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다양한 이민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들은 오직 주님께 의지해야 했다.

 

광야 시절보다 못한 점은, 백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바빌론에 살았지만 다른 곳에 사는 하느님 백성 공동체를 의식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난 이들은 국가 종교의 지원과 혜택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각 가정에서 물려 내려오는 전승에 의지해서, 자발적인 종교심만으로 살아야 했다.

 

이렇게 외적인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런 외적인 통제도 없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자발적으로 신앙을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신학을 발전시켰다. 어떤 번영의 위험에도 빠지지 않고 가난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되짚어 보는 백성의 곁을 저항 예언자들의 후손들이 지켰다.

 

 

오직 저항 예언자의 후손뿐

 

바빌론으로 유배된 백성은 그전과 다른 백성이었다. 그들은 처절한 망국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각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분명한 기준을 마음에 담았다.

 

기존의 지배 엘리트는 이 백성의 마음을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망국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번영과 성공을 위해서 다른 신의 믿음을 허용하자는 ‘현실적 정책’을 주장했었다. 하지만 부국강병을 이룰 것이라는 그들의 약속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백성에게 어떤 설득력도 얻을 수 없었다.

 

기존의 지배 엘리트 스스로 가난한 삶을 버티지 못하는 면도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들이었다. 높은 보수를 받고 화려한 삶에 익숙한 부류였다. 왕족, 고위 관리, 대사제들과 그들의 가족은 유배의 쓰라린 삶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상당수가 이집트를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450명이나 되었다는 바알의 예언자들과 400명이나 되었다는 아세라의 예언자들(1열왕 18,19 참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권력과 풍요의 신을 믿는 무리들이었으니, 가난한 삶을 이겨 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망국 이후에 이들의 기록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항 예언자들의 체질은 달랐다. 그들에게 유배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망국 이전에도 높은 자리나 보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한 번도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한 번제를 주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높은 지위와 안락한 삶을 누리던 사람을 비판했기 때문에, 탄압받거나 따돌림당했고 일부는 엘리야처럼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쫓기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유배는 그들에게 특별히 힘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상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늘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오직 저항 예언만이 이런 사태를 경고했음을 기억했다. 그래서 가난한 백성들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호세아의 후배들이 전해 주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수용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유효한 격언이리라. 유배는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를 양 떼 자신이 지켜 준 계기도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신앙생활의 형태

 

결국 가난한 백성의 대표, 곧 원로들과 저항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사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들은 이제 성전이 아니라 보통의 가정집에서 하느님을 찬미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번제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니, 그들은 저항 예언자의 후손들이 전하는 주님의 토라를 읽고 그 의미를 새겼다. 그렇게 함께 모여서 하느님을 섬기고 서로 소박하게 나눔을 실천했다.

 

낯선 땅에 흩어져 고통받던 처지였으니 처음에는 불규칙하게 모였을 테지만, 점차 안식일에 정례화된 모임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함께 와서 모이는 일, 곧 ‘함께(syn)오는(ago)모임’이 탄생하였다. 이렇게 시나고그(synagoge)는 유배 중에 태어났다.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그 의미를 나누는 신앙생활의 양식이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는가! 이 또한 예언자들과 함께 형성된 것이니 예언자들은 유배 중에도 믿음의 내용과 형식이 발전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선교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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