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9) 예루살렘 멸망 예고와 성전 정화(루카 19,41-48)
강도들의 소굴이 돼버린 하느님의 집, 예수님이 정화하시다 -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 모형.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성서」. 올리브산 동쪽 벳파게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내려오시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우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심(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을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①“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②“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19,43-44ㄱ) ③“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9,44ㄴ)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너’는 바로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말씀 ①은 그 자체로만 보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②는 예루살렘 도성이 어떻게 멸망할지를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또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③은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나타냅니다. ③은 또 ①의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해줍니다. 예루살렘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예루살렘이 알지 못하였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 예수님께서 한탄하시며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신 것을 기념해 예루살렘 도성이 한눈에 보이는 올리브산 중턱에 세워진 예수님 눈물 성당. 결국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이라고 슬퍼하시며 예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탄식하며 멸망을 예고하신 것은 루카복음에서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던 길에서 헤로데가 죽이려 하니 몸을 피하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에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13,34-35ㄱ) 이 말씀에 비춰보면 예수님께서 우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예루살렘에 평화를 가져다주시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당신을 배척하는 예루살렘을 두고 슬퍼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특히 ②부분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인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성전 정화(19,45-48)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기 시작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9,46)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신 것은 단지 성전에서 물건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장사치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도 행각은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와 다릅니다. 폭력이나 협박으로 물건을 강탈하는 사람을 강도라고 부릅니다. 위해를 가하지는 않더라도 심하게 폭리를 취할 경우 ‘날강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도 성전을 그들의 안전한 소굴로 버젓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 56장 7절을 인용한 이 말씀에는 하느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 자신의 집과 동일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래서 예수님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 순례 길에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이나 헤매던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함께 있는 아들 예수를 찾아냅니다. 왜 이렇게 애타게 하느냐는 마리아의 말에 소년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말하지요.(루카 2,41-50 참조)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합니다.(19,47-48) 이 대목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19,44ㄴ) 하고 예루살렘을 두고 우시며 예언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정화하시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도 깊은 성찰을 촉구합니다. 혹시 우리 또한 주님의 거처이자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을 차리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하여 찬미와 감사, 용서와 청원을 바치는 하느님의 집을 더럽히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몸 또한 하느님의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죄의 노예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요? 시기와 중상, 탐욕과 거짓, 사치와 교만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분을 알아뵙지 못할 것입니다. 알아보기 예수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20년에 헤로데 대왕이 증축 공사를 시작해 기원후 64년에 완공됐습니다. 사방이 두꺼운 벽으로 돼 있고 벽 안쪽에는 주랑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주랑으로 둘러싸인 성전 마당은 480mⒻ300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 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불렀는데, 비둘기 등 성전에 바치는 봉헌물을 파는 장사치들과 성전세를 내러 오는 이들에게 환전해 주는 환전상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내쫓으신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또 주랑에서는 율법 학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곤 했지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곳도 이 주랑이었을 것입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에,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남자들의 뜰,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사제들의 뜰에 이어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 6년 후인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됐고 현재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서쪽 벽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6월 24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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