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75) 예루살렘 멸망 예고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루카 21,20-28)
종말은 구원의 때, 두려워 말고 현실에 충실해야 - 종말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그림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최후의 심판.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종말에 앞서 시작될 재난에 대해 말씀하신(21,5-19)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고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예루살렘 멸망 예고(21,20-24) 루카복음에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고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1,20) 같은 내용을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지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읽는 이는 알아들으라─.”(마르 13,14) 마태오복음도 마르코복음과 비슷합니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읽는 이는 알아들으라─.”(마태 24,15) 같은 예수님 말씀이 루카 복음서와 마태오 및 마르코 복음서에서 차이가 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일단 이런 물음을 가지고 본문을 더 살펴봅시다.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21,21) 유다는 예루살렘이 속한 지방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 포위당해 함락될 처지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당합니다. 문제는 그다음 말씀입니다.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21,22-23) 이 대목을 보자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뤄지는 징벌의 날로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 특히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불충한 징벌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에 함락당하고 수많은 이스라엘인이 포로로 끌려갔지요. 옛날 예루살렘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21,24) 이 예언은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수많은 유다인들을 죽이고 포로로 데려가고 함으로써 역사적 현실이 됐습니다. 다만 마지막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배척해서 멸망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읍, 하느님의 백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마지막 말씀을 두고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모르는 이민족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시련을 겪으리라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루카복음의 예언과 마태오복음 및 마르코복음의 예언 말씀이 차이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루카가 복음서를 집필한 시기인 기원후 80년쯤에는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미 이루어지고 난 후였습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나 마르코와 달리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쓸 필요 없이 적군에게 포위됐다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을 썼다고 성경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1,25-28)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어서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첫 부분은 종말이 왔음을 알리는 표징들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표징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일 것이기 때문이다.”(21,25-26) 해와 달과 별에 생기는 표징들, 바다와 거센 파도소리에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는 것 등은 종말에 관한 구약성경의 표현들입니다. 묵시문학적 표현이라고도 하지요. 둘째 부분은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라는 대목입니다.(21,27) 예수님께서는 자주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시는데, 구약성경 다니엘서에서는 사람의 아들을 하느님께 뭇 민족과 모든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는 왕권을 받는 분으로 예언하고 있지요.(다니 7,13-14) 또 구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권능이나 현존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탈출 14,20; 34,5; 시편 104,3 등) 셋째 부분은 종말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 하늘에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과 바다가 거세게 뒤흔들린다면 사람들은 공포로 자지러질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은 늘 두려움과 결부됩니다. 하지만 루카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말이 오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야말로 속량이, 곧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 멸망과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풀이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예루살렘은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이처럼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종말이 재앙이 아니라 구원의 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복음의 가치와 상반되는 가치관이 팽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고통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5일, 이창훈 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