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통독하고 싶다] 하느님의 말씀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성경 통독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글을 부탁받고서 어떤 식으로 쓸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러저러한 이론을 들어 글을 쓰는 것보다 이제까지의 제 삶 속에서 숙고하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을 나누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 곧 하느님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이요 우리 삶이니까요. 먼저 ‘성경이 무엇이냐’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요. 하지만 대 그레고리오 교부는 이렇게도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경로를 통해 말씀하시지만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에 성경은 편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편지(혹은 이메일)를 받습니다. 내용이 힘든 편지도 있지만 우리를 기쁘게 하는 편지, 사랑하는 이의 편지도 있습니다. 이 후자의 편지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그래서 자주 꺼내어 읽게 됩니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편지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편지를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을 놓치고 사는 것이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그 편지를 보내신 하느님을 정말로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상대가 내 편지를 소홀히 할 때 그 상심이 얼마나 큰지를. 그러기에 하느님의 편지를 소중하게 다루고 읽는 것 자체가 그분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편지인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점차 알게 됩니다.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담겨 있으니까요. 성 예로니모는 ‘성서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모르는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어떤 것을 시험 삼아 해보았지만 그것을 해가면서 차차 재미를 느끼게 된 체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알아가고 그래서 마음에 사랑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재미없는 글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차츰 읽어갈수록 우리 안에 성경 읽는 재미가 생깁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차 알게 되고 맛들이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주신 예수님 안에서 당신이 사랑이심을 결정적으로 또 온전히 계시하셨기에 그 시선으로 성경 전체를 봐야 하겠지만 사랑하시는 그분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질투하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화내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너무나 다정스러운 모습으로, 어떤 때는 애걸하는 모습으로.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분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분에 대한 사랑은 그분을 닮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 자신을 형성해갑니다. TV와 인터넷을 자주 접하면 세상의 방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자리 잡게 되지만, 성경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성경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닮아가게 됩니다. 복음의 가치가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관을 식별해낼 수 있게 되고 하느님의 방식에 굳건히 머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저자가 역사적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면서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알아들었듯이, 우리도 지금 내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내 삶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을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게 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방식과 언어에 온전히 동화되신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그분의 마니피캇을 볼 때, 그분의 가치관은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른, 작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높이시는 하느님의 사고방식이며, 그분의 언어는 구약성경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하느님 말씀과 함께 사시면서 성경의 사고와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하신 분,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신 분, 성경 통독의 모범이십니다. 이외에도 성경을 열심히 통독할 때 우리는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을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 자체가 우리를 서서히 움직여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여러 인물들이 바치는 기도를 보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기도가 어떤지,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에 더하여 성경 통독을 통해 얻게 되는 더 좋은 것은 이미 읽었던 그 말씀들이 내 생각과 마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묵상 기도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있던 그 말씀들을 기억나게 해주셔서 하느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바오로서간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더하여 일상생활에서도 성령께서는 내 안에 담겨 있던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셔서 삶의 구체적 순간에 하느님을 따르도록 인도해주십니다. 분명 성령께서 이 일을 해주시지만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서 성령의 활동 영역을 더 좁히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더해줄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도 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인격과 마음을 드러내주는 거울입니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이 내게 보이고 더 와 닿기 때문입니다. 설령,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어떤 내용이 나를 일깨워주고 가르쳐줬다 할지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일깨움을 받기 전 나의 상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내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속을 꿰찔러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하느님 말씀(히브 4,12-13 참조)은 우리 모습을 훨씬 더 잘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우리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 부분을 밝히 드러내고 그런 우리에 대한 하느님 뜻까지 알게 하시어, 우리를 회개로 이끌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비추시기에 저는 성경을 통독할 때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에는 꼭 밑줄을 그어가며 읽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독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 신천지 같은 사이비 이단 종교가 우리 가까이에 있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태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전체를 볼 때도 항상 이단들은 성경을 전체 안에서 이해하지 않고, 문맥에서 분리한 어느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전체 안에서 보지 않을 때 그릇된 가르침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전체의 맥락 안에서 볼 때 특정 본문이나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문적으로 주석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의 연구 방법에서도 전체 성경 안에서의 이해를 추구하는 정경접근법이 상당히 호응을 얻고 있는 추세입니다. 지금까지 성경 통독의 필요성에 대해 제 숙고를 나누어봤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그것을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와 더 가까이 지낼수록 그 사람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가 성경을 더 많이 자주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말씀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참된 마음의 양식이고 하느님과 만남의 장입니다. 성경을 집 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또 우리의 중요한 소지품이 되게 하여 이 말씀이 늘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 김태훈 - 성바오로수도회 소속 사제로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수도회에 갓 입회한 형제들과 살고 있다. [생활성서, 2018년 8월호,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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